ADVERTISEMENT

장제스 “대륙에 밀사 보내 마오쩌둥의 패를 파악하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8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1〉

쑹시롄(둘째줄 왼쪽 다섯째)은 황푸군관학교 생도 시절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입당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군 경력도 화려했다. 신중국선포 2개월 후 쓰촨(四川) 성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앞줄 왼쪽 셋째는 2차 세계대전 중국 전구 참모장 스틸웰. 넷째가 윈난(雲南)성 주석 롱윈(龍雲). 1941년 11월 쿤밍(昆明). [사진 김명호]

쑹시롄(둘째줄 왼쪽 다섯째)은 황푸군관학교 생도 시절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입당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군 경력도 화려했다. 신중국선포 2개월 후 쓰촨(四川) 성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앞줄 왼쪽 셋째는 2차 세계대전 중국 전구 참모장 스틸웰. 넷째가 윈난(雲南)성 주석 롱윈(龍雲). 1941년 11월 쿤밍(昆明). [사진 김명호]

국민당은 대만에 딴살림 차린 직후부터 대륙과 접촉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1950년 5월,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 진공이 임박했을 때였다. 목적은 시간 끌기였다. 몇 주일 후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 참전을 결정한 미군이 대만해협을 봉쇄했다. 중공의 대만해방은 수포가 되었다. 밀사는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한국전쟁 터져 대만해협 봉쇄 #중공의 대만해방 계획 물거품 #저우 “양안 간 모순은 국내문제” #동시에 미국과의 담판 뜻 밝혀 #장징궈, 대륙에 밀사 파견 건의 #홍콩 국민당 지부 언론인 추천

1954년 9월, 샤먼(廈門)의 해방군 포대가 진먼다오(金門島)를 포격했다. 이듬해 1월, 중국인민해방군 화동군구가 저장(浙江)성 연해의 장산다오(江山島)를 점령했다. 장산다오는 국민당 군이 주둔 중인 다천다오(大陳島)의 병풍 격이었다. 미 7함대가 대만의 국민당 군과 합동작전을 폈다. 항공모함 6척을 포함, 159척을 동원해 연합함대를 꾸렸다. 숨넘어가기 직전인 노인 한 명을 제외한 국민당 정규군 1만명과 유격대 4000명, 주민 1만7000여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4만톤에 달하는 군용물자와 마을마다 있던 신상(神像), 부두에 있던 어선들은 쓰레기로 만들어버렸다.

미·중 대사급 회담만 136차례 개최

청스위안(왼쪽 둘째)은 대륙에서 대우를 받았다. 대만 밀사들과 접촉이 빈번했다. 1983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청스위안(왼쪽 둘째)은 대륙에서 대우를 받았다. 대만 밀사들과 접촉이 빈번했다. 1983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공산당 특유의 전술을 폈다. “미국이 대만해협에 긴장을 조성했다. 양안간의 모순은 국내문제다. 우리는 국·공관계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되기를 원한다.” 4월에 인도네시아 반둥에 아시아 아프리카 27개국 국가원수들이 모였다. 중국 대표 저우가 묘한 발언을 했다. “대만해협의 위기는 미국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담판할 용의가 있다.” 긴장을 완화하자는 의미였다. 미국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4개월 후, 제네바에서 미·중 대사급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바르샤바로 자리를 옮긴 대사급 회담은 1970년 2월 20일까지 136차례 열렸다.

베이징과 워싱턴 간의 긴장이 느슨해지자 대만해협의 군사적 대립도 완화됐다. 대륙작가와 대만 기자가 비슷한 구술을 남겼다. “1956년 봄 대만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베이징의 중공 최고위층이 보낸 서신을 받았다. 국·공양당이 3차 합작을 통해 통일 대업을 완성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미에 첨가한 펑화(奉化)의 선영은 여전하고, 시커우(溪口)의 화초도 무양(無恙)하다는 구절이 장제스의 심금을 울렸다.” 펑화와 시커우는 장제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시커우의 개울은 열일곱 살 때 혁명하겠다며 가출할 때까지 장제스의 놀이터였다.

항일전쟁 종군기자 시절의 차오쥐런. [사진 김명호]

항일전쟁 종군기자 시절의 차오쥐런.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냉철했다. 8월 21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공산 비적들의 최고투쟁 원칙은 음성적이고 탄력이 있다. 고정된 원칙이 없고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뻔뻔함은 기본이다. 곰팡이처럼 파고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철저히 단절하고 봉쇄하지 않으면 우롱당한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부친과 달랐다. 대륙에 밀사를 보내자고 건의했다. 홍콩의 저명한 언론인 차오쥐런(曹聚仁·조취인)을 권했다. 장제스는 아들의 권고를 수락했지만 차오를 믿지는 않았다. 5월 6일 일기를 소개한다. “홍콩은 떠돌이 중립분자들의 소굴이다. 조직도 한두 개가 아니다. 대륙의 정보원도 많고, 대륙에 잠복 중인 정보원도 많다. 아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홍콩의 국민당 지부에 차오쥐런을 우리의 통전 공작에 참여시키라고 지시했다.”

밀사 차오쥐런 두 달간 대륙에 체류

1957년 중국에는 유행성 감기가 창궐했다. 8개월간 전 세계로 퍼졌다. [사진 김명호]

1957년 중국에는 유행성 감기가 창궐했다. 8개월간 전 세계로 퍼졌다. [사진 김명호]

차오쥐런은 2개월간 대륙에 체류했다. 저우언라이와 통전부장에게 대륙의 대만 정책을 듣고 장제스의 고향도 찾아갔다. 장제스의 선영과 장징궈의 생모 묘소에 참배하고 사진도 찍었다. 차오는 본직이 기자였다. 전쟁 시절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쳤다. 취재라면 몰라도 밀사로는 문제가 많았다. 홍콩에 돌아오자 대륙에서 있었던 일을 신문에 연재했다. 장징궈는 부친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장제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차오쥐런은 쓸모가 있다. 앞으로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대륙에 파견해라. 대륙에서 맺은 인연을 꼭 쥐고 있으라고 전해라.”

장제스는 직접 밀사 감을 물색했다. 홍콩시보(香港時報) 사장 쉬샤오옌(許孝炎·허효염)을 타이베이로 호출했다. 쉬샤오옌은국민당 중앙위원을 겸한 홍콩의 국민당 지하조직 총책이었다. 장제스가 입을 열었다. “공비들의 평화통일 공세가 발동했다. 내게 편지를 보냈다. 평화를 외치며 뒤로는 딴 수작 부리는 것이 저들의 수법이다. 무작정 대꾸 안 하면 나를 평화통일에 역행하는 민족반역자로 몰아붙일 판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공산 비적의 의도가 뭔지, 마오쩌둥이 무슨 패를 만지작거리는지 파악하고 싶다. 대만에 있는 사람은 비밀유지가 안 된다. 홍콩과 동남아 거주자 중 세 명을 추천해라. 지금 대륙 사정은 청스위완(程思遠·정사원)이 잘 안다. 함께 의논해라.” 뜬금없는 말도 했다. “꿈에 쑹시롄(宋希濂·송희렴)이 내 앞에 나타났다. 초라한 복장에 고개 숙이고 울기만 했다. 지금 공더린(功德 林)전범수용소에 있다. 50세 생일이 멀지 않았다. 면회 갈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쉬샤오옌은 누구를 추천할지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홍콩으로 이주한 전 입법원장과 입법원 비서장, 입법위원 쑹이산(宋宜山·송의산)을 추천했다. 쑹이산은 쑹시롄의 형이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