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징궈 “우리는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나라에 태어났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0.04.0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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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0〉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은 선쥔산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대화 녹취도 수락했다. 일국양제의 시험구 홍콩반환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에 도착한 장쩌민. 1997년 6월 30일 오전, 홍콩 카이탁 공항. [사진 김명호]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은 선쥔산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대화 녹취도 수락했다. 일국양제의 시험구 홍콩반환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에 도착한 장쩌민. 1997년 6월 30일 오전, 홍콩 카이탁 공항. [사진 김명호]

한동안, 중국의 고위층들은 선쥔산(沈君山·심군산)을 만나고 싶어했다. 장쩌민(江澤民·강택민)도 선쥔산에게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만나면 한두 시간은 기본이었다. 세시간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일국양제의 우수성 설득에 실패했다. 전인대 상무위원장 완리(萬里·만리)도 마찬가지였다. 선쥔산과 브리지 게임을 하며 별 얘기를 다 주고받았다. 일국양치 주장하는 선쥔산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일국양제는 거론할 틈도 없었다.

장징궈 간청에 대륙 간 리츠바이
되레 반역자로 몰려 귀국 못 해

대륙과의 접촉 싫어했던 장제스
“평화 타령 하다 보니 전과만 희석
공비들과는 절대 자리하지 말라”

“선쥔산은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 파견한 밀사”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나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대륙에 밀사를 보낸 적이 없다”며 부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실을 모르다 보니 그랬다. 냉전 시절, 대만은 대륙에 밀사를 일곱 번 파견했다. 밀사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고위 관리나 선쥔산에 비견될 유명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첫 번째 밀사는 가오슝(高雄)의 동네음식점 주인이었다.

“선쥔산은 국민당 파견 밀사” 소문

장제스는 회담(會談)을 싫어했다. 화담(和談)은 더 싫어했다. 환담(歡談) 하며 시시덕거리는 법이 없었다. 대륙 시절 중공과 화기애애한 얘기를 나눈 적이 두 번 있었다. 미국의 강권 때문이었다. 타이베이(臺北) 천도 후, 국민당의 실패 원인이 공산비적(共匪)과의 화담 때문이라며 자탄했다. “몇 차례 전투는 근본적인 패배 원인이 아니다. 공비와 두 차례 화담이 나와 우리를 망쳤다. 미국대사 헐리와, 마셜 원수가 만나라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만나서 평화 타령 하다 보니 우리의 전과(戰果)가 희석됐다.” 아들 장징궈에게도 당부했다. “공비들과는 절대 자리하지 마라.”

당시 대만 인구는 600만 명에 조금 못 미쳤다.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들이 있었지만, 대를 이은 농민이 대다수였다. 대륙에서 철수한 군인들이 몰려들자 섬 안에 긴장이 감돌았다. 좌파의 선전이 맹렬했다. “군대는 뭐든지 공짜다. 의식주를 도민(島民)이 부담해야 한다.” 물가가 치솟고 물자는 부족했다. 공포와 불안이 뒤를 이었다.

선쥔산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세계적인 육상선수 지정(紀政)은 중풍에 걸린 선쥔산의 건강을 체계적인 운동과 산책으로 회복시켰다. 2004년 봄, 신주(新竹) 칭화대학 육상트랙. [사진 김명호]

선쥔산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세계적인 육상선수 지정(紀政)은 중풍에 걸린 선쥔산의 건강을 체계적인 운동과 산책으로 회복시켰다. 2004년 봄, 신주(新竹) 칭화대학 육상트랙. [사진 김명호]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미국은 국민당을 버렸다. 해방군인지 뭔지가 곧 들이닥친다. 국민당 고관들은 대륙에서 탈취한 황금 들고 대만 떠날 준비에 분주하다. 장제스의 동서 쑹즈원(宋子文·송자문)과 콩샹시(孔祥熙·공상희)는 일찌감치 미국으로 내뺐다. 지혜를 뽐내는 축들은 대만까지 올 생각도 안 했다. 홍콩에서 걸음을 멈췄다. 국민당 정권은 방첩을 이유로 출도(出島)를 금지했다.”

총정치작전부 주임 장징궈의 음성이 방송을 탔다. “그간 군사력을 분산시켰다. 전략적 실패였다.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우리의 거점인 대만을 공고히 하고 대륙 수복을 준비하겠다.” 아무도 안 믿었다. 장징궈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대륙과 대화를 시도했다. 밀사를 파견하기 위해 중공 고위층과 친분이 두텁거나 인척인 사람을 찾았다. ‘총통부 전략고문’ 탕언보(湯恩伯·탕은백)가리츠바이(李次白·이차백)를 추천했다. “나와 황푸군관학교를 같이 다녔다. 생도시절 흥정에 능했다. 어느 음식점이건 외상을 잘 줬다. 여자 설득도 뛰어났다. 애인에게 차일뻔한 동기생들을 많이 구해줬다. 중공 지휘부와 홍콩에 아는 사람이 많다.”

장징궈는 군 관련 정보를 움켜쥐고 있었다. 누가 누구하고 친한지 훤했다. 공군사관학교 교장 후웨이커(胡偉克·호위극)를 은밀히 만났다. “지금 대만은 풍전등화다. 총통이 중공과 화담을 원한다. 탕언보가 리츠바이를 천거했다.”

후웨이커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내가 잘 안다. 군관학교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다. 형과 형수가 프랑스 유학을 마친 중공당원이다. 누이동생은 상하이 시장 천이(陳毅·진의)의 형 천멍시(陳孟熙·진맹희)의 부인이다. 천멍시는 아군 장교였다. 동생 때문에 공산당에 투항했다. 리츠바이는 가족 관계로 진급을 못 하자 군문을 뛰쳐나왔다. 아는 사람 없는, 낯선 곳에서 뱃속 편하게 살다 죽겠다며 가오슝으로 갔다. 작은 식당을 운영 중이다.” 장징궈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나라에 태어났다. 편한 곳은 어느 구석에도 없다. 리츠바이 정도면 대륙의 대만 침공 자제를 설득할 수 있다. 네 뜻이라며 밀사를 맡아달라고 간청해라. 총통과 나는 거론하지 마라. 수락하면 내가 직접 만나겠다.”

1950년 5월 초, 리츠바이가 운영하는 식당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주인의 손이 벽을 향했다. 손가는 쪽으로 눈길을 준 불청객은 픽 웃었다. 나랏일 말하지 말라는 莫談國事(막담국사), 네 자가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몇 명 안 되던 손님이 빠져나가자 주인은 문을 걸어 잠갔다. 불청객 손을 잡고 구석 자리로 갔다. 텅 빈 식당에 폭소와 고성이 그치지 않았다. 해 질 무렵, 두 사람은 타이베이행 마지막 열차에 올랐다.

상하이시장 천이, 장징궈 제의 거절

완리 전인대 상무위원장(왼쪽 둘째), 국수 네웨이핑(왼쪽 첫째)과 함께 브리지 게임하는 선쥔산(오른쪽 둘째). 1991년 3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완리 전인대 상무위원장(왼쪽 둘째), 국수 네웨이핑(왼쪽 첫째)과 함께 브리지 게임하는 선쥔산(오른쪽 둘째). 1991년 3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리츠바이를 만난 장징궈는 긴말을 하지 않았다. “홍콩을 경유해라. 가족은 내가 책임지겠다.” 매제의 소개로 만난 천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장징궈는 나도 잘 안다. 나를 떠보기 위해 너를 우리 쪽에 보냈다. 장제스는 만회하기 힘들다.

국공합작은 시기상조다. 미국처럼 양당제를 실시하자는 장징궈의 제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내일 베이징에 간다. 마오 주석에게 보고는 하겠지만 기대하지는 마라. 국민당은 끝났다. 너도 여기 눌러앉아라. 친구들 만나서 같이 혁명대학에 입학하자고 권해라. 명단 주면 통전부에 연락하겠다. 내가 돌아오면 환영연 겸한 잔치 하자.”

1개월 후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 미 7함대가 대만해협을 봉쇄했다. 대만은 숨통이 트였다. 리츠바이를 까먹었다. 혁명대학을 마친 리츠바이는 국민당 특무로 몰렸다. 감옥에서 4년을 보내고 26년간 노동 개조를 받았다. 1980년 홍콩으로 추방당했다. 대만에 귀국을 요청했지만 반역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8년간 홍콩거리를 떠돌다 숨을 거뒀다. 희미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선쥔산이 리츠바이의 비극을 모를 리 없었다.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 쉬자툰(徐家屯·서가둔)과의 첫 대화 때 대만 정부나 기관의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임을 누차 강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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