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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미국은 대만을 하와이처럼 만들 생각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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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2〉

대륙은 사유제 폐지 후 삼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발동했다. 그 중 대약진운동은 철 생산을 제고하기 위해 사진과 같은 제련법을 개발했다가 철저히 실패했다. [사진 김명호]

대륙은 사유제 폐지 후 삼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발동했다. 그 중 대약진운동은 철 생산을 제고하기 위해 사진과 같은 제련법을 개발했다가 철저히 실패했다. [사진 김명호]

1956년 10월 대만의 대표적인 월간지 ‘자유중국(自由中國)’에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퇴진을 요구하는 글이 실렸다. 이어서 일본에 체류 중인 대만 독립운동 지지자들이 ‘대만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정국이 얼어붙었다. 대륙도 ‘사유제 전면취소’로 천지가 들썩거릴 때였다.

일본 패망 후 국민당이 대만 접수 #저우, 장제스의 밀사 쑹이산 환대 #대만 대표적 반공 월간지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 장제스 연임 반대 #마오, 대만공화국 임정 수립 불용 #“대등한 입장서 3차 국·공 논의를”

‘자유중국’은 총통부국책고문 레이전(雷震·뢰진)이 교육부의 지원금으로 간행했다. 편집위원 17명은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나온 교육자나 중견 지식인이었다. 정부간행물 취급을 받았지만, 민주와 자유·반공을 표방하다 보니 창간 초기부터 인기가 있었다.

10월 31일, 장제스 탄생 70주년 특집의 권두언과 15편의 문장이 대만을 들끓게 하였다. 발행인과 주간을 겸한 레이전의 권두언은 대만을 들었다 놓을 정도였다.

“우리는 내각책임제 확립을 요구한다. 더는 장제스의 총통 연임을 바라지 않는다. 모든 결정을 무지(無智), 무능(無能), 무위(無爲)의 3無 원수가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언론의 자유와 민주헌정의 실행, 대만경제와 국방제도의 개혁을 강렬히 요구한다.” 대만이 난리가 났다. ‘자유중국’은 13쇄를 찍었다.

“미국이 장제스 퇴진 사주” 소문

쑹시롄(왼쪽)은 전선에서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1944년 버마에서 유일한 사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쑹시롄(왼쪽)은 전선에서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1944년 버마에서 유일한 사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미국이 장제스의 퇴진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마오쩌둥보다 미국을 더 증오한다. 미국은 전 주미대사 후스(胡適·호적)나 전 총통대리 리쭝런(李宗仁·이종인), 일본에 망명 중인 랴오원이(廖文毅·요문의) 중 한 사람으로 말을 바꿔 탈 생각이다.” 장제스가 발끈했다.

레이전은 당적을 박탈당하고 감옥으로 직행했다. 후스는 장제스의 하야를 바라지 않았다. 미국에 있던 리쭝런은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공과 협상 중이었다. 도쿄에 있는 ‘대만공화국 임시정부’ 대통령 랴오원이는 후스나 리쭝런과 달랐다.

랴오원이는 토종 대만인이었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대만 명문의 후예였다. 이재에 밝은 할아버지 덕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일본 유학을 떠났다. 훗날 작가가 꿈이었다. 일본 문학에 심취했다. 정치학을 전공하던 형이 대륙행을 권했다. 랴오는 형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국민정부 수도 난징의 진링(金陵)대학 기계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시간대학과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화학과 공정학을 전공하고 예쁜 미국 출신 중국 여인과 결혼도 했다.

랴오원이의 부인은 어릴 때부터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를 동경했다. 천하의 명승지 항저우에 살고 싶다며 남편을 졸라댔다. “거울을 봐라. 항저우보다 네가 더 절경”이라고 달래도 듣지 않았다. 부인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저장대학 총장 앞으로 남편의 이력서와 학위논문을 보냈다.

랴오원이(오른쪽)는 1963년 대만으로 돌아왔다. 장징궈(왼쪽)의 배려로 처벌은 받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랴오원이(오른쪽)는 1963년 대만으로 돌아왔다. 장징궈(왼쪽)의 배려로 처벌은 받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저장대학은 인재를 발굴했다며 좋아했다. 공학원 교수 임명장을 미국으로 보냈다. 항저우에서 랴오는 연구에 몰두했다. 일본의 제당업에 관한 연구로 일본 군부의 극찬을 받았다. 당시 항저우는 일본군 점령지역이었다. 부친 병세가 심각하다는 전보를 받은 랴오원이는 부인과 함께 대만으로 돌아왔다. 부친상을 치르고 형들과 함께 사업에 뛰어들었다.

형들은 경영수완이 남달랐다. 대만의 일본총독부는 미국과 대륙 경험이 풍부한 랴오를 경계했다.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공습한 후부터 랴오는 고등계 형사들의 1급 요시찰 대상이었다. 가는 곳마다 미행이 붙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당이 대만을 접수했다.

대만 행정장관으로 부임한 천이(陳儀·진의)는 랴오의 경력을 높이 샀다. 공무국장에 임명했다. 중국어와 일본어·영어에 능통한 랴오는 대만의 지식인 사회에 명망이 있었다. 공직도 원만히 수행했다. 자비로 ‘대만민족정신진흥회’를 설립했다. 대만 청년들이 줄을 이었다. ‘대만헌정회’를 조직하고 선봉(先鋒)이라는 잡지도 창간했다.

대만의 정치·사회·경제·문화를 다루는 종합성 잡지였다. 젊은 식자층에 인기가 굉장했다. 선거 운은 없었다. 나가기만 하면 낙선했다. 1949년 12월, 장제스가 대만에 정착하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교토에서 ‘대만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1956년 2월 말 대통령에 취임했다. 태양과 초승달이 들어간 국기도 선을 보였다.

장제스나 마오쩌둥은 골수 중국인이었다. 서로 으르렁거렸지만, 한 개의 중국과 대만이 중국의 영토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마오는 대만 출신 망명객의 ‘대만공화국 임시정부’ 수립과 ‘자유중국’의 장제스 퇴진 요구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등한 입장에서 3차 국·공합작을 논의하자”며 장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제스가 대륙에 밀사를 파견한 이유는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만 명망가 랴오원이, 일본 밀항

간첩 은닉죄로 타이베이 검사국에 출두한 레이전. [사진 김명호]

간첩 은닉죄로 타이베이 검사국에 출두한 레이전. [사진 김명호]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장제스의 밀사 쑹이산(宋宜山·송의산)을 환대했다. 오찬을 함께하며 기억력을 뽐냈다.

“북벌과 항일전쟁으로 우리는 두 차례 합작한 경험이 있다. 서로 무기와 식량을 주고받으며 한솥밥을 먹었다. 온 김에 동생 쑹시롄(宋希濂·송희렴) 만나라. 내가 황푸군관학교 교육장 시절, 시롄은 내 제자였다. 천껑(陳賡·진갱)과 함께 땀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며칠 있으면 50세 생일이다. 외부에선 대륙이 칠흑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여러 곳 다니며 우리의 현실을 직접 둘러보기 바란다. 홍콩에 내 옛 친구들이 많다. 언제와도 환영한다고 전해라. 국·공 양당의 대표들이 머리를 맞댈 수 있다면 장소는 홍콩이건 어디건 상관없다. 미국은 대만을 하와이처럼 만들 생각이다. 대만은 중국 땅이다. 외국의 중국 내정 간섭과 대만독립을 용납 못 하는 것은 양당이 다를 바 없다.” 쑹이산은 통일선전부장과도 두 번 만났다. 3차 국·공합작 이후 장제스의 예우 등을 논의했다.

쑹이산은 2주간 제철공장과 농업합작소 들을 참관하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홍콩의 국민당 책임자 쉬샤오옌(許孝炎·허효염)은 장제스에게 직접 보고하겠다는 쑹이산을 만류했다. "총통의 명령이다. 보고문부터 작성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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