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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이대로 괜찮지 않은, 디지털 장의업계

중앙일보

입력

'디지털 장의사'. 흔히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글·영상이라도 모두 삭제해주는 IT 전문가가 연상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겐 거의 '신적인 존재'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난달 31일 국내 1호 디지털 장의업체 산타크루즈컴퍼니를 찾아 삭제 과정을 직접 살펴본 결과, 디지털 장의사는 세간의 그런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달 25일 민갑룡 경찰청장이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본부 화상회의에 앞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5일 민갑룡 경찰청장이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본부 화상회의에 앞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디지털 장의사의 주요 업무는 '삭제 권한을 가진 사이트 운영자(신고센터)에게 피해자 대신 삭제를 요청하는 것'이다. 15개 안팎의 국내 업체 모두 이 방식을 쓴다. 해킹으로 지우면 불법이다. 피해자가 유포 현황을 일일이 모니터링하기가 심리·물리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파고든 사업인 셈이다. 사업 노하우는 '사이트별 이용약관에 맞춘 전문적인 삭제 요청'이다. 텔레그램 n번방 집단 성착취 사건 취재를 위해 만나본 4명의 디지털 장의사는 모두 "피해자에겐 이렇게라도 눈에 보이는 90%를 지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결국 10%는 남는다. 운영자와 연락할 수단이 없는 다크웹, 불법촬영물과 비동의 유출 동영상(리벤지 포르노)이 주요 수입원인 일부 국내외 음란물 사이트에선 계속 유통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사자에게는 뼈 아프지만 포털 사이트가 보기에 지워줄 이유가 없는 비방글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겐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지워 줄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디지털 장의사들은 '말끔히 삭제해준다'는 과장된 광고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의뢰인 입장에선 그야말로 '희망고문'이다. 안재원 클린데이터 대표는 "실제론 쓰지도 않는 '빅데이터를 쓴다', '올라오자마자 삭제한다', '무조건 다 없애준다' 등 온라인 상에 과장 광고가 넘쳐난다"며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일단 의뢰부터 받고 보자는 속셈인 업체들이 상당수"라고 했다.

서울경찰청은 2018년 한 디지털 장의업체에 음란사이트 유포 방조 혐의를 적용했다. [사진 서울경찰청]

서울경찰청은 2018년 한 디지털 장의업체에 음란사이트 유포 방조 혐의를 적용했다. [사진 서울경찰청]

디지털 장의사의 신뢰도는 이미 낮아질대로 낮아졌다.특히 2018년 웹하드 내 불법촬영물 거래를 방조한 '양진호 사건'과 노출 사진 불법 유출 사건(유튜버 양모씨 사건)으로 디지털 장의사가 웹하드업체·음란 사이트 등과 결탁해 성범죄 피해물을 방조해온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때마다 자정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고쳐지지 않았고 '성착취 카르텔의 협조자'란 오명마저 생겼다. 당시 음란 사이트 유포 방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던 한 업체는 최근 'n번방 영웅'으로 계속 언론에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 업계에선 "몇몇 문제 업체를 빼고 협회를 만들어 직업윤리를 정립하자"는 자정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 출발점은 의뢰인을 속이는 허위·과장 광고를 스스로 자제하고 진짜 피해를 본 이들을 돕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그간 말로만 그쳤던 자정노력이 실제로 실행돼야만 오명에서 벗어나 피해자를 도와주는 'IT전문가'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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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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