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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받아야 화장실 간다…'닭장' 갇힌 콜센터 상담원의 일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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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애플북스]

[사진 애플북스]

"하나의 인간의 존중받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이나 모른 척하며 꾸역꾸역 지내온 날들···."

"고객은 나를 기계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 감정 없이 자판기 버튼을 꾹꾹 누르는 것처럼 나를 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는 보통 주 6일 근무, 하루에 받는 70콜 이상, 한달에 1500콜 이상의 전화를 받았다. 매일 구로디지털 단지로 출근했고, 온종일 앉아서 '고객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콜센터 상담원이다. 최근 그가 낸 『콜센터 상담원, 주운 씨』(박주운 지음, 애플북스)는 5년간 구로콜센터에서 일하며 겪은 경험을 담아 쓴 책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퇴사를 결심한 시점부터 퇴사하는 날까지 쓴 글"이다.  서문에서 그는 "어디에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응어리진 마음을 풀었다"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고객'이었던 우리는 어땠을까? 책은 우리가 고객으로서 상담원과 통화했던 순간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한다.

『콜센터 상담원, 주운 씨』출간 # 전화기 너머 우리가 보여준 민낯 # '닭장'같은 사무실, 미세먼지 가득

뮤지컬, 콘서트, 연극, 전시, 체험, 행사 등 티켓을 판매하는 기업의 인바운드(고객의 전화를 받아 문의를 해결하는 곳)에서 일하며 상담원 입장에서 저자가 경험하고 정리한 '진상 보고서' 대목을 소개한다.

①씨x. 미친x, 개xx야! 죽여버린다! : 욕설형

"야, 이, 씨xx아, 그따위 대답밖에 못 해? 거기 앉아서 돈 버는 게 쉽지, 미친 x아, 너 오늘 잘 걸렸다. 나한테 욕 좀 먹어봐 개xx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고객이 이런 말을 쏟아내면 당황스럽다가 화가 나고 비참해진다고 했다. 요즘은 욕설하는 고객에게 상담이 어렵다는 경고를 할 수 있고, 세 번 이상 욕설하면 상담원이 통화를 종료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②목소리가 섹시하시네요~ : 성희롱형 

어떤 공연에 대해 문의하며 "이 공연 어디까지 벗나요? 다 나오나요?" 묻는 사람도 있다. 스포츠 경기 예매에 대해 묻다가 "**나라 남자 거기는 몇 센티미터에요? 엄청 크다고 하던데…"하는 사람도 있었다. 요즘엔 성희롱형 고객이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상담원 목소리가 섹시하다, 얼굴이 예쁠 것 같다 등의 말을 하는 고객이 있다.

③너 일하는 데가 어디야, 내가 찾아간다! : 협박형 

"찾아가서 내 앞에 무릎 꿇게 할 거야!: "야구 방망이 들고 찾아간다!" "콜센터 주소 문자로 보내. 내가 찾아가서 불 질러버린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과격한 성향의 고객들은 이런 말을 쏟아 붓는다. "사시미 칼 가지고 가서 찔러 죽이고 창자를 다 xxxx!!!" 이런 말을 한 고객도 있다. 대부분 말뿐이지만 일부 '행동력' 있는 사람은 진짜 찾아오기도 한다.

④그러니까 네가 거기서 전화나 받고 있는 거야:무시형 

어떤 고객은 "그러니까 네가 그따위 일을 하면서 나한테 욕이나 먹고 있는 거야. 평생 그렇게 살아라!" 라는 말도 한다. "대학 안나왔지, 공부 더럽게 못 했지, 그러니까 나이 쳐먹고 전화나 받고 있지" 라고 말하는 고객도 있다. 이런 말이 상담원에겐 욕설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고 한다.

⑤사장(팀장, 윗사람)바꿔!: 바꿔형 

자신의 요구사항이 먹히지 않을 때 윗사람을 찾는다. 상담원이 고객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안내를 할 때 책임자와 통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 그런데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상담원을 위협하려고 윗사람을 찾는 고객도 있다.

⑥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말실수 인정하시죠?: 꼬투리 잡기형 

트집을 잡으며 상담원을 괴롭히는 유형. 자신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린다. 본인 실수가 명백해도 조금이라도 잘못된 안내를 하거나 불친절하게 응대하면 상담 태도를 문제 삼으며 잘못을 뒤집어씌운다. 통화하기 정말 피곤한 유형. 이 유형에는 의외로 상담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⑦규정이고 정책이고 난 몰라!:우기기형 

무논리로 진상을 부리는 유형. 티켓 취소가 불가한 점, 취소 수수료가 부과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도 "난 그런 거 몰라. 절대 수수료 못 내니까 그냥 취소해줘!"라며 억지를 쓴다.

⑧너 내가 누군지 알아?: 자기 PR형 

기업이나 상담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며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유형. "전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크게 잘못하고 계신 거예요. 회사에도 좋은 거 없을 텐데···"라며 은근한 협박을 하기도 한다.

⑨순 날강도 아니야? 생때같은 내 돈을!: 구두쇠형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통화비가 아깝다며 자신에게 전화하라는 고객이 있다. 갑자기 "전화기가 잘 안들리는데요, 저한테 전화 좀 해주시겠어?"라며 연기도 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지불해야 할 수수료 2500원이 아까워 막말에 협박, 거짓말까지 불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내가 돈 천 원이 아까워서 그러겠어 " "2500원이 아니라 기분이 나빠서 그래요."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상담원들은 안단다. 그게 모두 돈이 아까워서 하는 행동이라는 걸.

인간의 존엄성까지 밟히고 싶지 않다

저자는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불만을 제기하고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고객은 현명한 소비자"라며 "진상은 상식의 범위를 넘어 상담원을 괴롭히는 일부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콜센터에서 일하면 어쩔 수 없이 진상을 만난다고 들었지만, 그들의 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받는 일이 상담원의 책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담원은 이렇게 일한다

최근 코로나 19 무더기 확진자가 발생한 서울 구로 콜센터 한 빌딩. [연합뉴스]

최근 코로나 19 무더기 확진자가 발생한 서울 구로 콜센터 한 빌딩. [연합뉴스]

저자는 "이름만 대면 아는 기업"을 위해 일했지만, 그는 대기업 산하에서 콜센터를 운영하는 아웃소싱업체 소속이다. 저자는 "콜센터 일은 자존감을 지키며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고객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회사"라고 썼다. 상담원들은 대개 이런 환경에서 일한다

①허락받고 화장실 간다

"이들에게 나는 회사의 지원, 혹은 인간이 아니라 하루에 79콜 이상 받아내는 도구일 뿐이다···다 큰 성인이 화장실에 갈 때마다 허락을 받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상담원에겐 당연한 처사"다.

②사무실 환경은 미세먼지 가득하다

"콜센터는 마치 닭장 같다. 넓지 않은 사무실에 백 명이 넘는 상담원이 다닥다닥 붙어 전화를 받는다. 옆 사람 거리는 턱없이 좁아서 한 명이 감기에 걸리면 전염되기 쉽다. 독감에 걸려 며칠 고생하다가 겨우 나왔는데 주위 직원들이 그대로 옮아 굉장히 미안했던 적이 있다" (34·36쪽)

이런 환경을 고려하면 최근 구로콜센터 상담원들이 '단체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린 것은 전혀 놀라운 얘기가 아니다.

③허리 통증, 안구건조증, 소화불량은 기본이다. 

④우울과 불안 증세로 퇴사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스트레스로 폭식증 등 식이장애나 심각한 불면증에 걸리는 동료도 있다.

지난 11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 120 경기도 콜센터에서 관계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소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1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 120 경기도 콜센터에서 관계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소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담원들의 고민 해결하는 콜센터는?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면서 "상담원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콜센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 정녕 퇴사 말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걸까"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책에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세상이 있다"고.

이 책을 기획한 애플북스 조은아 편집자는 "보통 상담원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직업군인데 온라인에서 그의 글 연재를 지켜보며 공감되는 이야기가 많아 출판을 기획했다"며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면 특정 직업군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한편 저자는 5년의 상담원 생활을 마감하고 1년 전 콜센터를 퇴사했으며, 현재 틈틈이 글을 쓰며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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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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