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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 터에 ‘일제 기억 오디오’ 설치하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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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호 18면

『서울, 권력 도시』 토드 헨리 교수

1929년 경성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때 제작된 관광안내조감도.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졌던 광화문 등이 보인다. 박람회는 진보를 약속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동화 정책의 하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진 산처럼]

1929년 경성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때 제작된 관광안내조감도.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졌던 광화문 등이 보인다. 박람회는 진보를 약속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동화 정책의 하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진 산처럼]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은 경성 거주 조선인들의 신사 참배를 의무화한다. 사적인 영역도 파고들었다. 집집마다 가정용 신사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해 신토(神道) 신앙의 본산 이세신궁의 부적을 모셔야 했다. 일제 강점 말기 황국신민화 정책이다.

신토 신사, 박람회, 공중위생 등 #우리의 통념과 다른 경성 재조명 #농촌선 신사를 ‘왜놈 귀신’ 불러 #전염병 면역력, 조선인이 더 강해

이런 식으로 일제의 지배전략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살피는 데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의 내면, 일상의 실천을 잘 알 수 없다는 게 한계였다.

『서울, 권력 도시』와 저자 토드 헨리 교수. [사진 한겨레신문]

『서울, 권력 도시』와 저자 토드 헨리 교수. [사진 한겨레신문]

UC샌디에이고 역사학과 토드 헨리(48) 교수가 최근 펴낸 『서울, 권력 도시』(산처럼, 2014년 영문판 『Assimilating Seoul』)는 그런 ‘전체사’의 한계에 도전한 미시사(微視史) 연구서다. 비교문학자 메리 루이스 프랫이 제안한 ‘접촉 지대(contact zone)’ 개념을 내세워 경성의 공공 공간을 살폈다. 신토 신사, 각종 박람회, 공중위생 운동이 펼쳐졌던 시가지를 대상으로 삼았다. 이질적인 주체들이 뒤섞인 접촉 지대에서 어떤 충돌과 활기가 빚어지는지를 살피겠다는 거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경성일보 등 일본어 자료를 광범위하게 훑었다고 한다. 한국인 연구자들이 소홀했던 영역이다.

그 결과 드러난 경성의 모습은 우리의 통념과는 다르다. 접촉 지대에 수시로 출몰하는 조선인들의 불온한 언동으로 인해 일제의 동화정책, 통치 권력이 뒤틀리고 굴절되는 장면이 책에 수시로 나온다. 가령 농촌 지역에서는 일제 서슬이 시퍼렇던 종전 1년 전까지 가내 신사를 ‘왜놈 귀신’이라고 불렀다. (345쪽)

서울, 권력 도시

서울, 권력 도시

‘식민지 수탈론 vs 근대화론’ 같은 이분법적 역사관과 배치되는 탈식민주의 방법론인데 이런 시도가 아주 새로운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단편적인 사실들을 묶어낸 솜씨가 수준급이라는 게 책을 번역한 김백영 광운대 교수의 평가다.

고장 난 요즘 한·일 관계를 헨리 교수는 어떻게 바라볼까. 전화로 만났다.

일본의 조선인 동화 정책은 결국 차별적인 동화 정책이었다. 책에도 그런 부분이 언급돼 있다.
“동화에는 무척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이 존재한다. 나는 경성 거주자들의 일상에 동화 정책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를 미시적으로 하나씩 분석하고 싶었다. 물론 일제의 동화정책에는 차별적인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가령 지금 우리가 처한 자본주의 체제만 해도 굉장히 억압적이고 차별적이지 않나. 식민 치하에서 부자가 된 사람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사람도, 황국신민이 되고 싶어 한 조선 사람도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시기다.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
미시사적 접근은 자칫 사건의 인과관계를 흐려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어려움은 있다. 그런데 단순히 ‘일제’라고 하면 그게 총독부인지 보다 넓은 의미의 식민 권력인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신사 참배만 해도 그렇다. 일제 강점기에는 누구나 의무적으로 신사를 참배해야 했었다고 많은 한국인이 상상하는데 1930년대에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1910~20년대 경성의 일본 거류민들은 신토를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여겨 오히려 조선인들의 참여를 막았다. 식민지의 다양한 주체들의 삶의 경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보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1930년대 우리가 보는 것은 엄청난 긴장의 정점이다. 일제는 절박하게 조선인들을 동원하려 했지만 권력 메커니즘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폭력의 표출이었다. 일제가 처음부터 조선인을 억압했다고 상상했다가는 실제 식민주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놓치게 된다. 조선인들은 실제로 동화되려 하면 다시 차별받는 경험을 해야 했다.”
일제의 동화정책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정책과 비교한다면.
“동화정책을 펼친 제국주의 국가는 많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가 부상하자 식민지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통제력을 유지하는 식으로 정책을 변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피부색이 하얗지 않은 유일한 제국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제국은 같은 아시아 종족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다른 제국과는 다르다는 점을 선전하고 싶었고 그에 따라 끝까지 동화정책을 고수했다.”
그런 과정에서 신토는 어떤 역할을 했나.
“서구 제국주의가 확산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 종교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개인 차원의 개종보다는 동원을 위한 국가 종교, 공공 종교였다.”
1920년대 일본인들의 전염병 감염률이 조선인들보다 높았다는 대목이 책에 나오는데 어떻게 해석하나.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많은 일본인이 한반도의 토착 질병에 대한 면역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보다 공중위생 측면에서 우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많은 공적 자원이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던 남촌에 집중됐고 조선인들은 그만큼 치료받을 기회가 줄어들었다. 조선인의 면역력은 일본인보다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건물, 남산의 조선신궁 등을 철거한 한국 정부의 결정이 과거를 침묵시키는 협소한 반(反)정치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흔적을 지우려 한 일제와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았다고 지적했는데.
“경복궁 복원 사업에 반대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거다. 경복궁은 어쩔 수 없지만 남산 같은 경우 식민지 시기의 흔적을 되살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 기억하기가 가능할 것 같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국인 희생자를 합사한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게 될 때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리라 초등학교 자리에 과거 경성신사가 있었는데 그런 사실이 거의 잊혀졌다. 그 역사를 되살리는 오디오 안내 시설을 설치하면 어떨까. 현재 한·일 갈등의 깊은 뿌리에는 역사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가령 일제 치하 신사 참배 문제만 해도 교과서에 약간 소개된 내용 말고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조선총독부, 조선인, 일본인 거류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사 참배의 역사를 신사가 서 있던 공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 간의 역사갈등은 한국만 제대로 기억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두 나라 사이에 합의된 역사 기억이 가능하다고 보나.
“어렵다고 본다.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한다. 결국은 미국까지 포함해서 한·미·일의 역사를 함께 봐야 한다. 왜냐면 미국은 가령 한국인 위안부 문제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 냉전 체제에 일본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식민 통치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넘어가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식민 치하 조선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행위자들의 복잡한 작용을 세밀하게 알아야 한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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