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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과점·볼링장·극장·호텔, 배우에서 사업가로 거듭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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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원로배우 신영균씨가 서울 충무로 옛 명보극장 외벽에 자신의 모습을 새긴 부조(浮彫) 앞에 서 있다. 신씨는 2010년 500억원 대의 이 극장을 사회에 기부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원로배우 신영균씨가 서울 충무로 옛 명보극장 외벽에 자신의 모습을 새긴 부조(浮彫) 앞에 서 있다. 신씨는 2010년 500억원 대의 이 극장을 사회에 기부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로 열심히 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소망이 하나 있었다. “나만의 극장을 장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번에 밝혔듯 1970년 김희갑과 함께 제작한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가 계기가 됐다. 서울에 개봉관이 10곳밖에 없던 시절, 추석 대목에 상영관을 찾느라 극장주에게 사정 사정을 해야 했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62) #<33> 꿈에 그리던 명보극장 #연기 생활은 불안정해 대책 찾아 #77년 7억여원 들여 극장주 변신 #2010년 500억 자산 사회에 환원 #“충무로 유산 하나쯤은 보존해야”

당시 나는 서울 금호동 금호극장을 갖고 있었다. 공사비 1000만원을 들여 63년 1월 1일 다시 문을 열었다. 지상 2층 230석 규모다. 재재개봉관쯤 됐지만 극장 수입이 배우 개런티보다 나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번듯한 개봉관을 운영하고 싶었다.

77년 8월, 드디어 꿈이 현실이 됐다. 명보극장을 7억5000만원에 인수했다. 명보극장 회장이라는 직함도 얻었다. 57년 설립된 명보극장은 당대 최고 영화관 중 하나였다. 나는 극장 이름값을 높이려고 힘썼다. ‘내가 버린 여자’(1978) ‘속(續) 별들의 고향’(1979) ‘미워도 다시 한번 80’(1980) 등을 상영해 3년 연속으로 한국영화 최다 관객을 기록했다.

‘지옥의 묵시록’ 등 70㎜ 대작 틀어

그 무렵 극장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살아남으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84년 들어 3개월 동안 대대적 리모델링을 했다. 7억원을 들여 외관을 도시형 페어·미러 글라스와 대리석으로 단장하고 완벽한 냉난방시설 및 입체음향 돌비시스템을 갖췄다. 재개관작은 테일러 헥포드 감독의 액션 멜로 ‘어게인스트’였다. 덕분에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작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70㎜ 대형 화면으로 틀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 서울에서 70㎜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명보극장과 대한극장 두 곳뿐이었다.

1980년 명보극장 풍경. [중앙포토]

1980년 명보극장 풍경. [중앙포토]

변신은 계속됐다. 94년 극장명을 명보프라자로 개칭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상영관을 선보였다. 2001년 리모델링해 다시 명보극장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대기업 멀티플렉스 영향으로 관객이 줄어들면서 2008년 폐관했다. 2009년 뮤지컬·연극전용 극장인 ‘명보아트홀’로 탈바꿈시켰고, 단관 226석 규모의 명보실버극장도 개관했다.

2010년 용단을 내렸다. 애지중지 꾸려온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을 사회에 기부했다. 부동산업자들이 극장 주변을 재개발하겠다며 “500억원에 팔라”고 해도 꿈쩍 않던 나였다. “충무로가 한국영화의 고향인데 유서 깊은 극장 하나쯤은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다.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가 없다. 아들 등 가족들도 나를 적극 밀어줬다.

예전부터 이런저런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배우라는 직업이 아무래도 불안정했기에 가족을 책임지는 밑바탕을 다져야 했다. 노력 때문인지, 행운 때문인지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우선 60년대 초 명보극장 옆에 있던 명보제과 빌딩을 600만원에 인수했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태극당·풍년제과와 함께 우리나라 4대 제과로 꼽힐 만큼 이름이 났다. 배우 활동으로 바쁜 나 대신 아내가 직접 경영을 맡아 사업을 키워나갔고, 이후 25년간 성업했다.

신씨가 소유한 서울 명동 ‘호텔28’ 내부 모습. [중앙포토]

신씨가 소유한 서울 명동 ‘호텔28’ 내부 모습. [중앙포토]

당시 우리 부부는 서울 쌍림동에 살다가 아예 제과점 빌딩으로 거처를 옮길 만큼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1·2층은 제과점, 3층은 살림집, 4층은 직원 숙소, 5층은 빵 공장이었다. 남부러울 게 없는 스타가 멋지고 화려한 집에 살지 않고 빌딩 건물에 산다며 ‘짠돌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셋방살이로 시작해 열 번 넘게 이사 다니면서 평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 있던 나였다. 사업이 자리를 잡은 후엔 구의동으로 이사했다.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개인 최초의 볼링장에도 손을 댔다. 대만 현지 촬영을 갔다가 볼링이란 것을 처음 접했다. 한국에 들여오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국내에는 미 8군이나 워커힐호텔에 볼링장이 있는 정도였다. 볼링 대중화와 거리가 먼 때였다. 볼링이 사치품이라고 정부에서 허가를 잘 안 내줘 용품 수입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70년대 초, 지금의 명동 ‘호텔28’ 건물 3·4층에 전세를 얻어 신스볼링을 차렸다. 1층은 맥줏집 라데빵스가 있어 라데빵스 빌딩으로도 불렸다. 음악감상실 로즈가든까지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라 볼링장을 차리기에 제격이었다. 신영균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은 다 몰려들었다. 나도 틈나는 대로 신성일·남궁원·윤일봉 등 동료 배우들과 볼링을 즐겼다. “네 사람이 함께 뜨면 충무로 거리가 반짝반짝했다. 팬들이 구름처럼 쫓아다녔다”는 말마저 돌았다.

뜻밖의 화재사고, 재기의 발판 삼아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겨울철 화재사고로 볼링장을 접어야 했다. 불이 나던 순간 나도 그 장소에 있었다. 당시 집에서 김장을 하던 아내가 목에 수건을 멘 채로 놀라서 달려왔다. 사람들이 막는 걸 뿌리치며 남편을 찾았는데 나는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후였다. 다행히 건물 뒤편 홈통을 타고 탈출하다가 손등이 긁히는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나를 보고서야 아내는 “무사하셨군요”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위기는 기회도 됐다. 건물주가 빚이 늘어서인지 72년 이 건물을 내놓는다고 했다. 나는 그간 벌어둔 돈에 은행 대출을 받아 6억원에 빌딩을 매입했다. 명동 증권거래소 맞은편이라 금융기관이 줄줄이 입주하는 걸 보고 건물명을 증권빌딩으로 바꿨다.

증권빌딩도 2016년 7월 28일 부티크 호텔 ‘호텔28’로 다시 태어났다. 영화 카메라·포스터·트로피 등 내 연기 인생 60년을 집약한 유물을 포함해 호텔 전체를 영화 풍으로 꾸몄고, 현재까지 꾸려 오고 있다. 참고로 ‘28’은 내가 태어난 1928년에서 따왔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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