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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조용필도 반한 문희, 그의 눈물에 온 국민이 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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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한국 멜로영화의 지평을 넓힌 ‘미워도 다시 한번’에 나온 신영균과 문희. 신파영화라는 비판에도 대중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중앙포토]

한국 멜로영화의 지평을 넓힌 ‘미워도 다시 한번’에 나온 신영균과 문희. 신파영화라는 비판에도 대중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중앙포토]

청년 조용필의 가슴을 설레게 한 여인, 이순재가 꼽은 가장 예쁜 배우. 동료 엄앵란도 “눈이 보름달같이 반짝여서 한 번 보면 꼼짝 못 할 정도”라고 극찬한 연기자. 한국영화 전성기를 빛낸 여배우 트로이카 1세대, 문희(73) 이야기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57) #<28> ‘만인의 연인’ 문희 #4편까지 만든 ‘미워도 다시 한번’ #중년 남성팬들 “신영균이 부럽다” #결혼 후 충무로서 멀어진 청순파 #10년 전부터 전통성악 정가 배워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은 ‘연산군’(1961) ‘빨간 마후라’(1964)와 함께 내가 인생의 3대 영화로 꼽는 작품이다. 사극·전쟁영화에 주로 나온 내가 멜로영화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됐다. 섬세한 감정연기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문희의 청순한 눈망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부남 아이 몰래 키운 비련의 여인 

문희는 유부남 신호(나)를 사랑하지만 조강지처(전계현) 때문에 난처해지자 홀로 숨어 아들(김정훈)을 낳고 키우며 살아가는 비련의 여주인공 혜영으로 나온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이의 장래를 위해 사업가인 아버지에게 아들을 떠나보내게 된다. 나는 두 여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년 남성의 고뇌를 드러냈는데, 영화를 본 주변 남성들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이냐”라며 부러워했다.

김정훈을 아역스타로 끌어올린 ‘미워도 다시 한번’(왼쪽). 김정훈은 이후 ‘꼬마신랑’ ‘고교얄개’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김정훈을 아역스타로 끌어올린 ‘미워도 다시 한번’(왼쪽). 김정훈은 이후 ‘꼬마신랑’ ‘고교얄개’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전 국민이 울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영화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최루탄 영화’라는 신파 멜로물이 시리즈 4편까지 나올 정도였다. 100년 한국영화사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이다. 1편은 37만 관객을 동원했다. 2편, 3편, 4편도 각각 25만, 20만, 14만 명을 기록했다. 문희와 함께 극장 무대를 돌며 ‘미워도 다시 한번’ 주제곡을 부른 기억도 난다.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완창하는 노래는 ‘빨간 마후라’와 이 곡 둘 뿐이다.

영화에 함께 나온 전계현씨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다 돼 간다. 빈소에서 만난 문희는 “이제 선생님과 저 둘뿐이네요”라며 슬퍼했다. 전씨 생전에 셋이 함께 만나면 “‘본마누라’와 ‘세컨드’가 같이 있다”고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문희의 데뷔작 ‘흑맥’. 신성일과 함께했다. [중앙포토]

문희의 데뷔작 ‘흑맥’. 신성일과 함께했다. [중앙포토]

문희는 이만희 감독의 ‘흑맥’(1965)으로 데뷔해 7년간 200편 넘는 영화를 찍었다. 서라벌예대 1학년 재학 중 KBS 탤런트 선발 공모에 응시했는데 때마침 카메라 테스트반에 이 영화의 조감독이 참여했다고 한다.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주연이 된 문희는 불량배 두목 독수리(신성일)를 사랑하는 고아 출신 아가씨 미순 역을 맡아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문희(본명 이순임)라는 예명을 붙여준 사람도 이만희 감독인데, 영화의 원작자인 소설가 이름이 이문희였다.

문희는 1971년 한국일보 부사장이었던 고 장강재 회장과 결혼했다. 64년 신성일·엄앵란 결혼식에 버금가는 화제를 모았다. 당시 문희가 출연 예정이던 영화를 장 회장이 제작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결혼식 전 장 회장의 부친이자 한국일보 창립자인 장기영 선생이 내게 만남을 청했다. 평소 영화팬으로 나를 아껴주던 분이었다.

“동료 배우로서 문희를 오래 지켜봐 왔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희는 좋은 연기자이고, 굉장히 순수한 사람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혼사가 오가던 중에 내게 한 번 더 확인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결혼한 문희는 김기덕 감독의 ‘씻김불’(1973)을 끝으로 영화 활동을 접었다. 훗날 “촬영장이 아니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았다”며 은퇴 사유를 밝혔다. 결혼과 함께 충무로에서 멀어진 수많은 여배우의 속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당시 배우들은 수십편씩 ‘겹치기 출연’을 하다 보니 밤샘 촬영을 하고 차에서 쪽잠을 자는 게 일상이었다. 어지간한 장정도 버티기 쉽지 않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일정이다. 주연배우라도 메이크업·의상을 알아서 챙겨야 했다. 지금처럼 제작 환경이 좋았다면 문희도 계속 연기를 했을지 모른다. 요즘도 “좋은 작품만 있으면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두고 뒷말도 많았다. 혹자들은 그들을 경쟁 구도로 몰아갔다. 예로 윤정희·남정임과 함께 ‘결혼교실’(1970)을 찍을 때 문희가 두 사람의 패션에 압도당해 꾀병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기 의상이 초라하게 느껴지니 기절한 척해서 하루 일정을 통으로 날렸다는 거다. 문희는 “제가 고작 의상 때문에 그럴 사람이냐”며 억울함을 토로하곤 했다. 영화계와 멀어진 후에도 그들은 조용히 우정을 쌓아갔다. 80년대 중반쯤 문희가 자기 집에 윤정희·남정임·고은아를 초청해 가든파티를 열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2년 전 신성일 장례식 때 엄앵란을 친자매처럼 챙긴 사람도 문희다.

영화 기사 모은 스크랩북만 150권 

19살 연하의 문희는 평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나도 “문희씨”라며 예의를 갖췄다. 문희는 결혼생활 22년 만인 93년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이후 한동안 칩거 생활을 할 만큼 실의에 빠져 지냈다. 하지만 이윽고 홀로서기를 했다. 한국종합미디어 대표이사,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이사 등을 지냈고 2003년부터 백상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10년 전부터 전통성악 정가(正歌)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다”고 했다.

문희의 또 다른 취미 중 하나는 신문기사 스크랩이다. 중앙일보에 실리는 내 회고록은 물론 과거 윤정희·백건우 부부 인터뷰 등 영화계 주요 기사를 가위로 오려 모은 스크랩북이 벌써 150권이라고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선배·동료 영화인을 세심하게 챙기는 마음씨가 참 고맙고 아름답다. 두고두고 ‘만인의 연인’으로 남을 만하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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