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권력의 무상함 일깨운 10·26 “인생 공부 다시 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심훈의 소설을 영화화한 ‘상록수’. 신영균은 일제강점기 농촌운동에 뛰어든 젊은이로 나온다. 최은희?신성일도 함께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심훈의 소설을 영화화한 ‘상록수’. 신영균은 일제강점기 농촌운동에 뛰어든 젊은이로 나온다. 최은희?신성일도 함께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얼마 전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관람했다. 후배 배우 이병헌이 주연을 맡았다. 2013년 이병헌 결혼식 때 내가 주례를 맡은 적이 있는데, 그는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시사회 초대장을 보내온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52) #<23>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62년 영화 ‘상록수’ 찍은 뒤 만나 #농촌개발 새마을운동에 큰 영향 #김정일은 북한 영화교재로 사용 #김형욱·박종규 등과도 알고 지내 #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룬다. 이병헌은 박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나온다. 역시 이병헌의 명품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다. 다만 박 대통령의 비극적 말로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내 개인적으론 박 대통령의 공과를 균형 있게 다루지 못한 느낌이다. 박 대통령은 3선 개헌, 유신 선포 등 장기 집권을 꾀하려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산업화 공로를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나도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김재규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지만,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당시 나는 ‘화조’(1978)를 끝으로 촬영 현장에선 멀어졌지만 한국영화인협회장으로 일하는 등 충무로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오로지 영화만 보고 살았기에 권력의 흥망성쇠에는 관심이 적었지만 10·26 사건을 보며 “인생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 과욕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도 권력을 내려놓는 시기를 판단하지 못해서 화를 입는 통치자들이 많지 않은가.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게 그해 우리나라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영화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신상옥 감독의 ‘상록수’(1961)로 이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상록수’는 최우수 각본상·최우수 음악상·최우수 남우조연상(허장강)도 휩쓸었다. 최은희는 그해 제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상복이 많은 작품인 셈이다.

아시아영화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 번갈아 개최되는데 그해 우리가 개최국이었다. 박 대통령이 의장을 맡아 영화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했고, 최우수작품상 등은 직접 시상을 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나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 여사와 함께 종종 청와대에 초청받아 박 대통령 내외와 식사를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최고 권력자의 앞이라고 해서 특별히 위압감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배우라는 직업을 최고로 여기는 나였기에 대통령 앞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육영수 여사는 우리가 갈 때마다 마치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다. 박지만은 어린 초등학생이었다. 박 대통령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신영균씨, 수고했어요. ‘상록수’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우리나라도 농촌을 개발해야 잘사는 나라가 될 겁니다.”

1960년대 한국 농촌개발 열기를 다룬 신상옥 감독의 ‘쌀’(1963).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1960년대 한국 농촌개발 열기를 다룬 신상옥 감독의 ‘쌀’(1963).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70년대 들어 “잘살아 보세”를 내건 새마을운동이 범국민적으로 펼쳐졌다. 박 대통령이 ‘상록수’를 보고 감동을 받아 새마을운동을 구상한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충분히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상록수’는 농촌 부흥에 매진한 60년대 우리나라의 현실을 은유한 영화였다.

신 감독과 함께 찍은 영화 ‘쌀’(1963) ‘삼일천하’(1973) 등도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고 있다. ‘쌀’은 가난한 농민들이 피나는 노력 끝에 바위산을 뚫어 금강 물을 끌어다가 벼농사를 짓는다는 줄거리다. 나는 여기에서 마을 발전에 앞장서는 6·25 참전 상이용사로 등장한다. ‘삼일천하’에서는 1884년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김옥균을 연기했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해 삼일천하라고 불린다.

영화학자들은 신 감독의 이런 영화들이 박 대통령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계몽영화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지금은 자유로워진 편이지만 그 당시 영화는 정부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만들어졌다.

나중에 최 여사에게 들은 얘기지만, 신 감독은 박 대통령과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영화 검열 문제를 꺼냈다고 한다. 최 여사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얘기다.

“각하, 한국영화도 이제 다른 산업처럼 해외시장에 진출해야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제일 먼저 생각과 표현에 제약이 없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검열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두 정부가 잘하자고 하는 일이니 정부 측 사정도 고려해 가며 연구해 봅시다.”

“각하, 어느 정도가 아닙니다.”

“검열이 그렇게 심하오? 알겠소. 알아보고 조치하겠소.”

하지만 그 후로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박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지면서 신 감독의 영화사 신필름이 더욱 위기를 맞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필름은 북한의 영화를 일으키는 데 크게 일조했다. 78년 최은희·신상옥 납북 사건 이후에 말이다. 영화광으로 알려진 김정일은 “북한 영화의 발전을 위해 두 사람을 납치한 것”이라며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최 여사는 북에 납치된 후 매주 금요일 김정일이 주관하는 연회에 초대됐는데 김정일이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우린 최 선생이 나온 영화를 모두 갖고 있습네다. 그중에 ‘상록수’는 우리 동무들의 영화 교재로 쓰고 있습네다.”

한국영화의 원본 필름들이 북한에 더 많이 소장돼 있다고 한다. 검열·규제 등 많은 난관에도 한국영화는 지난 한 세기를 잘 버텨왔다. 표현과 소재의 한계가 사라진 우리 영화가 앞으로도 계속 커갈 것으로 믿는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