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반성하라-선관위장 사표를 경종 삼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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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회창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사퇴는 바로 정치권에 대한 경종이자 반성의 촉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위원장은 동해시와 영등포 을 구에서 있은 올해 두 차례 재선거의 타락·탈법 선거운동을 막지 못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타락·탈법·폭력의 선거운동을 자행한 주인공들은 누구였던가. 바로 출마한 후보들이요, 그들을 공천·지원한 각 정당들이었다.
지난 두 차례 재선거에서 공명선거를 위해 기울인 선관위의 노력은 정말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비록 허점이 많은 선거법이었지만 그 테두리 안에서 타락과 불법을 막기 위해 선관위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 사실이고 전례 없이 후보자 전원을 고발했는가 하면 각 정당 대표들에 대한 고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선관위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동해와 영등포 을 구의 선거양상은 어떠 했던가. 각 정당의 집중적인 인적·물적 지원아래 자금의 대량 살포, 공공연한 탈법·불법 운동의 횡행, 심지어 후보매수 극과 유세장 폭력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던가.
이 두 번의 재선거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공명선거가 되자면 선관위만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고 정치권의 일대 자각과 관련법의 재정비가 필수적임을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재선거가 끝난 후에도 이렇다 할 반성과 제도정비의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리대로 하자면 사표를 내야할 쪽은 이 위원장이 아니라 정치인과 정치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사퇴로 정치권에 대해 이처럼 경종을 울리고 공명선거를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준 이 위원장의 처신을 높이 평가한다.
바로 직접적인 자기 책임까지도 이런저런 핑계로 모면하기에 급급한 우리의 공직 풍토에서 이 위원장이 누구 한사람 자기에게 책임지라고 거론하는 한 마디도 없는 터에 스스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서는 자세는 하나의 귀중한 선례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난 두 차례의 재선거 과정에서 이 위원장이 보여준 공명선거의 의지를 지지하고 공감한바 있었지만 이번에 그가 행동으로 만들어낸 선례가 앞으로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의 사명감·책임감을 높이고 용기와 권위를 북돋우게 될 것임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정치권으로서는 이 위원장의 사퇴가 주는 교훈을 빨리 스스로의 행동으로 구체화해야할 것이다. 선거는 공직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부여하는 절차로서 그 절차가 타락·불법일 경우 그 공직에 대한 국민 신뢰를 크게 해치고, 나아가 통치조직에 대한 불신까지 초래하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는 이 위원장의 지적은 정말 정치권이 뼈아프게 되새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각종 선거가 끝날 때마다 정치권은 선거법의 문제점을 운위하고 상대방의 불법·타락을 비난하는 데만 열중했을 뿐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공명선거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데는 전혀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최근 심각성을 보이고 있는 정치인의 부패문제와 함께 정계는 이제 선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더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하며, 그런 노력은 정계의 반 부패운동·자정운동으로, 선거관계법의 개정추진으로 구체화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선거 사범에 대한 당국의 처리 자세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회창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사퇴를 애석해 하면서 그의 사퇴가 갖는 뜻을 살려나가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주시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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