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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만들기] 21. 와우아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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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1970년대에 '와우아파트'는 '무너지기 쉬운 것' 또는 '부실한 것'을 일컫는 대명사였다. 와우아파트는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에 지어진 시민아파트로 준공 4개월 만인 70년 4월에 무너져 무려 33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광복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판자촌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늘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집을 잃거나 월남해 당장 잘 곳이 없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60년대에는 농촌 인구가 대거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서울의 하천변이나 산자락 등은 온통 판잣집들로 뒤덮였다. 판잣집들은 대부분 무허가였지만 매매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판잣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그 수가 늘어나면서 판잣집 등 무허가 건물의 난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수차례에 걸쳐 "무허가 건물 건설 억제와 정리"를 강조했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66년 구청을 통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무허가 건물은 13만6천여동이었다. 金시장은 그 중 4만6천동은 개량사업을 통해 양성화하기로 하고, 나머지 9만동은 주민들을 시민아파트를 지어 이주시키거나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 옮기도록 해 철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에 따라 훗날 금화아파트로 알려진 첫 시민아파트는 68년 6월 착공됐다. 힘든 공사였다. 해발 2백3m의 고지대 공사장까지 자재 운반이 힘들어 공정(工程)이 무척 더디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공사를 진행하는 데 지친 한 서울시 간부가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아파트를 지어야 합니까. 공사도 어렵고 입주자들도 고생할 텐데 좀 낮은 곳에 지으면 안 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질문에 金시장은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게 아니냐"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金시장 재임 중에 건립된 시민아파트들은 대부분 산 정상이나 중턱에 들어서 있다. 국.공유지가 주로 고지대에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金시장의 말처럼 고층건물이 거의 없던 때여서 대통령의 눈에 잘 띄게 하려면 고지대에 짓는 것이 가장 쉬웠다.

金시장은 금화아파트 공사가 거의 마무리돼가던 68년 12월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임기 4년째인 69년에는 시민아파트 건설에 온힘을 쏟았다. 그 결실로 69년에만 모두 32곳에 무려 4백6동 1만5천가구의 시민아파트가 지어졌다. 요즘도 수도권에 들어서는 공공임대주택이 연간 3만가구를 넘기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물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지질검사나 측량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기초도 아주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건설업계 형편으로는 그만한 물량을 소화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공사 계약 업체가 하청을 주고, 그 하청을 받은 업체가 다시 하청을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관리.감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축직 공무원의 수와 질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부실 시공을 우려한 金시장은 관급 시멘트.철근을 쓰도록 했지만 일부 하청업체들은 관급 자재를 빼돌리고 대신 자갈.흙 등을 써 마구잡이로 부실 공사를 해댔다.

그 처참한 결말을 보여준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16개동은 69년 12월 준공돼 이듬해 3월 입주가 시작됐다. 그러나 입주 때부터 벽 등 곳곳에 이미 금이 가 있었다. 관할 구청장과 건축과장이 그해 4월 3일 가장 위험해 보이는 14동의 주민을 대피시키고 나머지 동에 대해서도 보강공사를 벌였다.

하지만 4월 8일 새벽 15동이 폭삭 무너져내렸다. 15동 주민 73명 중 3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당시 언론은 숫자만 늘리면 된다는 식의 이른바 '와우식 근대화'가 계속되면 우리 모두 죽게 되는 결과가 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金시장은 결국 4월 16일자로 경질되고 말았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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