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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아동성추행…침묵하는 교단에 피해자들이 뭉쳤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76) 영화 ‘신의 은총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취임 이후 사제가 저지른 아동 성추행에 ‘무관용’ 원칙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 덧붙여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제가 오히려 그들의 존엄성을 파괴하면 안 된다” 고 강조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런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아동 성추행 사건이 계속 나오고 있고 또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경자년 새해 처음으로 소개해드릴 영화는 다소 무겁긴 하지만 프랑스 리옹에서 실제 일어난 한 신부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1970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이 사건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동 성추행 피해자알렉상드르 게렝 역을 연기한 멜빌 푸포. 프레나 신부에 대한 분노와 교회를 향한 존중 사이에서 고뇌하는 알렉상드르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진 영화사 찬란]

아동 성추행 피해자알렉상드르 게렝 역을 연기한 멜빌 푸포. 프레나 신부에 대한 분노와 교회를 향한 존중 사이에서 고뇌하는 알렉상드르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진 영화사 찬란]

리옹 교구에서 만든 보이스카우트 그룹에서 부속 사제로 활동하던 프레나 신부(버나드 베를리 분)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약 20년간 70명의 아이에게 성범죄를 저지릅니다. 이중 성폭력을 당한 한 아이의 부모가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사건을 고소하려고 합니다. 이때 프레나 신부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데요. 부모는 아이에게 2차 피해가 갈까 염려돼 고소를 포기하지만, 교회에서 프레나 신부를 파면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 일로부터 몇 년 후 바르바랭 추기경(프랑수와 마르튜레 분)이 리옹 대교구장에 취임하는데요. 프레나 신부는 그에게 자신이 소아성애자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교단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이를 묵인해버리죠.

이후 피해자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을때까지 프레나는 현직에 있었고 심지어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 중 하나인 알렉상드르(멜빌 푸포 분)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바르바랭 추기경과 교단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가 교단에 있으면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공소시효도 지난 몇십년된 일을 왜 들추냐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죠. 이에 분노를 느낀 알렉상드르는 피해자 중 처음으로 고소합니다. 이때부터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수면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성추행 사건 피해자들의모임 ‘라 파롤 리베레'. 실제 존재하는 이 모임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사법적, 의료적 도움 등을 안내한다.

성추행 사건 피해자들의모임 ‘라 파롤 리베레'. 실제 존재하는 이 모임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사법적, 의료적 도움 등을 안내한다.

사실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재작년 소개해 드린 ‘스포트라이트’가 대표적인데요. 스포트라이트가 성추행 사건 피해자를 취재하는 기자의 입장에서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이 영화에서는 사건의 당사자가 직접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전면에 나섭니다.

또 영화의 화자가 피해자에서 또 다른 피해자로 옮겨가면서 개인일 때는 용기 내기 어려웠던 사람이 한 명 두 명 모이는 과정을 보여주죠. 이들은 실제 ‘라 파롤 리베레’라는 피해자들의 모임을 만들어 연대의 힘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피해자들의 잇따른 고백과 언론 보도를 통해 대중의 분노를 사게 되자 바르바랭 추기경은 기자회견을 엽니다. 사과하고 죄를 인정하는 줄 알았던 추기경은 한 기자의 질문에 경악스러운 말을 남기죠. “신의 은총으로 공소시효가 끝났다.” 그들이 말하는 ‘신의 은총’은 어떤 의미일까요.

프레나 신부의 범죄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바르바랭 추기경 역의 프랑수아 마르튜레. 기자회견에서 ’신의 은총으로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명언(!)을 남긴 장본인이다.

프레나 신부의 범죄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바르바랭 추기경 역의 프랑수아 마르튜레. 기자회견에서 ’신의 은총으로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명언(!)을 남긴 장본인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피해자들 일부가 여전히 독실한 신자였다는 점입니다. 입장을 바꿔 내가 만약 어린 시절 그런 피해를 보았다면 신이란 존재를 믿지 않고 교회 쪽으론 발도 들이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피해자들 간 대화를 듣고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의 중심에 있어야 사실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단지 프레나 신부가 비판받아 마땅하고 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은폐하려 한 교단의 구시대적인 발상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데요.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이 실명이고, 대사 역시 피해자들의 증언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활용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했습니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지난해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죠.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이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겠냐는 질문에 “그렇다. 이 영화가 교구에 ‘새로운 기회’가 되길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교구는 소아 성범죄자들에 책임을 묻고 그들을 색출하는 새로운 변화를 꾀할 수 있을 테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프레나 신부의 형사 재판과 바르바랭 추기경의 항소심을 앞둔 지금 영화는 어떤 파문을 몰고 올 수 있을까요. 저도 영화의 힘을 믿어보겠습니다.

신의 은총으로

영화 '신의 은총으로' 포스터.

영화 '신의 은총으로' 포스터.

감독&각본: 프랑수아 오종
출연: 멜빌 푸포, 드니 메노셰, 스완 아르라우드, 프랑수아 마르튜레, 베르나르 베를리
촬영: 마누엘 다코세
음악: 이브구에니 갈페린, 사차 갈페린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37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2020년 1월 16일

중앙일보 콘텐트유통팀 대리 hyeon.yese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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