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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 후 미국 외교정책 '힘' 중시로 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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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민 기념 강연회가 25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학생·주부 등 1000여 명의 방청객이 참석해 고홍주 학장의 강연을 듣고 있다. 김태성 기자

고홍주 미 예일대 법대 학장은 25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열린 '유민기념 강연회'에서 '법과 세계화, 인권'을 주제로 강연하며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인권과 외교 정책에 위기가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국제 협력보다 힘을 중시하고 있으며, 인권 정책은 보편주의를 벗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연 요지.

◆ 북한 인권은 문제=인권이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고유한 권리다. 모든 나라의 정부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 의무가 있다. 국제 인권 운동은 평등.민주화.기업의 책임.환경.공공보건 운동과도 연결돼 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권은 서양 철학뿐 아니라 동양의 불교.유교.도교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동양에는 인권의 개념이 없다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재로부터 인권을 보호하려는 전쟁이었다. 나치의 대학살(홀로코스트)은 인종학살 방지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전 인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49년 제네바 협약과 54년 난민협약과 같은 국제 인도법 조약들이 등장했고 국제사법재판소(ICJ)도 설립됐다. 이후 유엔 인권위원회와 같은 인권을 집행하는 기구들과 휴먼라이츠워치, 국제사면위원회 같은 비정부기구(NGO)들이 생겨났다.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는 인권에 대한 낙관주의가 전 세계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북한.캄보디아.이라크.소말리아.아이티.보스니아.코소보.동티모르.르완다에서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 9.11 테러 이후의 변화=2001년 미 본토를 겨냥한 9.11 테러 이후 세계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미국의 외교 정책에도 큰 변화가 왔다. 외교를 중시하던 정책에서 무력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세계 각국이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에서 국제법과 국제협력을 무시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미국은 말로는 다른 나라의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이중 기준을 추구하고 있고, 유엔의 메커니즘도 무시하고 있다. 인권에 대한 회의(懷疑)가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은 세계화 시대의 한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 문제, 이스라엘-헤즈볼라 간 대결, 이란 사태, 지구 온난화 등 환경문제, 질병 같은 난제가 산적해 있다.

◆ 법도 세계화=20세기의 법학은 현실과 의식이 유리돼 있는 영화 '메트릭스'의 한 장면 같았다. 국제법과 국내법이 분명히 나눠져 이분화돼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법학은 다르다. 점점 더 많은 국가가 미터법이나 '닷컴' 같은 지구촌의 공통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법도 마찬가지로 국경을 넘어 존재한다. 공법 대 사법, 국제법 대 국내법이라는 전통적인 구분도 넘어선다. 국제 형사법, 지적재산권법, 상법 등이 대표적 예다. 대량 학살에 관한 법과 반인륜적 범죄에 관한 법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법률 행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요즘 법무법인들은 '글로벌 로펌'을 표방한다. 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우고 다른 나라에 진출하기도 한다. 한국과 미국의 법률 교육기관들도 이에 맞춰 교과 과정을 바꾸고 있다.

◆ 법학 교육의 역할=법학 교육기관들은 세계화라는 흐름에 '인간의 얼굴'을 입히는 일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또 법이 세계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진화.발전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세계화는 대세다. 이를 거스르려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인도주의적 세계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서 법의 지배를 제대로 확립하는 일은 정부나 관리들에게만 맡겨 놓기엔 너무 중요한 일이다. 법학자들은 물론 교육기관과 관심 있는 시민들이 나서 떠안아야 할 도전이다. 또 법이 세계화 과정 속에서 어떻게 진화.발전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가정.교육.민주주의라는 전통적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 유민기념강연회=중앙일보가 창립자인 고(故) 유민(維民) 홍진기 회장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매년 개최한다. 그동안 주제 연설자는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석좌교수(99년),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2000년), 앤서니 기든스 런던대 교수(2001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2002년),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러시아 전 총리(2003년), 첸치천(錢其琛) 전 중국 부총리(2004년)다.

"자녀 교육 기회로 …" 학부모들 대거 참석
이모저모

이날 강연회에는 김경원 전 주미 대사,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 고흥길.안명옥 한나라당 의원,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송자 대교 회장(전 연세대 총장) 등 각계 인사와 방청객 약 1000명이 참석했다. 특히 고 학장을 자녀의 역할 모델로 삼고 싶어하는 학부모들이 방학을 맞은 자녀와 함께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부인인 메리 크리스티 피셔 변호사와 아들 고원림씨, 누나인 고경신 중앙대 교수 등 가족들도 함께했다.

고 학장은 연단에 올라 "한국말을 조금밖에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우리말로 인사했고 방청객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그는 법,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와 더불어 가족과 교육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는 "대학생이던 1974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고 미국에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다"며 "이것이 법과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 중 하나"라고 말했다.

2000년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 시절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수행해 평양에 갔던 일화도 공개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장시간 대화하면서 그가 참모들과도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모습을 봤다며 "그는 매우 특이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40분간의 강연이 끝난 뒤 고교생부터 칠순 노인까지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한 여대생은 "가정환경이나 경력이 너무 화려해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고 하자 고 학장은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 높아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질의응답은 예정된 시간을 30분이나 넘겼다. 공식 행사가 끝난 뒤 학생들이 고 학장 주변으로 몰려들어 사인을 받고 카메라폰으로 그를 찍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다음은 토론과 일문일답 요지.

▶송호근 서울대 교수=북한 정권을 붕괴하거나 자극하지 않고 남북한 파국 없이 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다.

▶고홍주=북한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바란다. 따라서 외교적 협상을 계속해야 한다. 북한의 인권은 세계 최악의 상황이다. 더 나쁜 것은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교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인권 유린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쉬운 해결책은 없다. 에너지.식량 등을 주고 점진적 개방을 유도해야 한다.

▶김병국 고려대 교수=국제법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을 때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강대국은 자국의 관심과 이해를 국제법에 반영시키려 하는데.

▶고홍주=가치가 있어야 힘이 생기는 것이다. 가치에 집중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 힘이 생기고 영향력이 생긴다. 군사력 같은 '하드 파워(hard power)'는 한계가 있다. 제도 자체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로 움직인다. 법이나 외교가 후자에 속한다.

▶김경원 전 주미대사=국제 분쟁을 외교력과 같은 소프트 파워로만 해결할 수 있나.

▶고홍주=명분이 없는 하드 파워는 오히려 약하다. 이라크를 보자. 초기 이라크전의 성과와 달리 사회 혼란과 민주주의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지 않은가.

최지영.박현영 기자 <choiji@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 고홍주 학장 강연 동영상 바로가기 → 조인스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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