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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박기영 우울증 고백 "그 시간 지나왔을뿐 이기는게 아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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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언니는 괜찮은 것 같아요. 잘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야. 똑같아.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끝내고 싶을 때가 많아.”

마음의 병, 우울증 上 내가 경험한 우울증 #데뷔 4년 차에 소속사 부도 겪은 뒤 #무기력함 느끼면서 우울증 찾아와 #친구 손에 이끌려 정신과 찾아 #이겨냈다 말 못 해…잘 버텼을 뿐 #후배 설리·구하라 비보 안타까워 #도움 두려워 말고 주변에 알리길

데뷔 22년차 가수 박기영(42·사진)이 후배와 최근 이런 대화를 나눴다. 후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 쉬었다. 박기영은 “나도 여전히 그렇다”고 말했다.

가수 박기영이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지난 19일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기영은 자신이 겪은 우울증에 대해 "이겨냈다고 말 못하겠다. (그 시간을) 지나왔다"고 말했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수 박기영이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지난 19일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기영은 자신이 겪은 우울증에 대해 "이겨냈다고 말 못하겠다. (그 시간을) 지나왔다"고 말했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기영은 1998년 데뷔해 ‘마지막 사랑’ ‘시작’ 등의 대표곡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에게도 우울증은 감기처럼 왔다. 2001년 4집을 낸 뒤 소속사 부도 등 여러 어려움이 닥쳤다.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항우울제를 먹었다. 데뷔 후 1년마다 앨범을 냈다. 그렇게 4집이 나왔다. 하지만 우울증 등의 이유로 5집을 내는데 3년 걸렸다.

그는 지난 3일 YTN라디오가 주최한 고(故) 임세원 교수 1주기 추모 콘서트에서 이런 경험을 털어놨다. 박기영은 “20대 때 굉장히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겨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 시간을) 지나왔다”고 말했다.

박기영은 19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우울증에 대해 “이겨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잘 지나갈 수 있게 습관을 배워야 한다”며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는 사회에서 압박과 좌절, 실패가 반복되면 누구에게나 우울증이 불쑥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목소리다.

“아무리 내가 노를 저어도 강이 얼어있으면 배가 나갈 수 없잖아요. 그런 상태인 거에요. 상황이 그렇게 되면 ‘내가 아무리 하려 해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생각하면서 (우울감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박기영은 "우울증은 언제든 불쑥 찾아올 수 있다"며 "(우울증을 견딜) 자신만의 습관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기영은 "우울증은 언제든 불쑥 찾아올 수 있다"며 "(우울증을 견딜) 자신만의 습관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처음엔 무기력이 그를 덮쳤다. 불면의 날이 늘었고 하고 싶은 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사람을 피했다. 그때 그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있었다. 친구가 매일 찾아와 안부를 살폈다. 친구는 ‘힘내, 마음 단단히 먹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싫다는 박기영을 질질 끌고 나가 밥을 먹이고 영화를 같이 봤다. 우울증 환자는 ‘가짜 위로’에 고통 받는다. 우울증 경험을 담은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의 저자 백세희(29)씨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고 조언하는 건 골절 환자에게 열심히 걸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사각지대에 놓인 우울증 환자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사각지대에 놓인 우울증 환자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박기영은 친구 손에 이끌려 병원(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 갔다. 의사에게 어려움을 털어놨다. 박기영은 “약물치료(항우울제)를 하면서 극단적 선택 충동을 이긴 것 같다”고 말했다.

박기영은 우울증 환자에 "도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기영은 우울증 환자에 "도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는 ‘우울 내성’을 기르려고 노력한다. 뭔가에 몰입하는 것인데, 이게 있으면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박기영은 “음악이든, 운동이든 (우울증을 견딜) 자신만의 습관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겐 곡을 만드는 것이다. 박기영은 “고통의 결정체를 음악에 담았다. 그렇게 나온 노래가 5집의 ‘나비’”라고 말했다. ‘숨이 가빠와도 훨훨 날아, 내 아픈 기억이 다신 널 찾지 않도록….’이란 노랫말에 3년의 아픔이 담겼다.

30대에 산후우울증을 겪은 후 ‘걸음걸음’이란 노래가 나왔다. 박기영은 “하루하루 발바닥이 찢길 만큼 고통스러워도 끝까지 걸어야 하는 게 삶이다. 그 고백을 노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눈을 뜨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땐 ‘습관을 갖자’는 것 자체가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런 의욕이 생길 수 있을 때까지, 그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도움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설리와 구하라 등 후배들의 비보를 안타까워 했다. 박기영은 “‘스스로 이겨내라’ 하지 말고 사회가 함께 정신건강을 돌봐줘야 한다. 소속사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너무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 또한 내 것으로 잠시 안고 있어도 괜찮아요. 밀어내고 너무 애쓰려다 치이지 말고, 그 시간도 잠시 끌어안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은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돼요. 저는 그랬거든요.”

박기영은 강조한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주변에 가족이든 친구든 (도움받을) 누군가 한 명은 있을 거예요. 도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창피할 일도 아니에요. ‘요즘 상태가 안좋아’ 라고 말해야 해요. 약물도 그렇지만 의료진 상담이 정말 중요해요. 경청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습니다. 굉장히 좋아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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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영은 뮤지컬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간혹 의료진의 도움을 받는다. 공연 전후 잠을 잘 못자고 스트레스 받을 때다. 박기영은 “2013년부터 심리센터를 찾는다. 상담을 받고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 받아 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우울증은 빠른 진단과 꾸준한 치료가 중요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평생 우울증을 한 번 이상 겪는 사람은 100명 중 5명(2016년)인데 상담·치료하는 사람은 절반(52.5%)에 그친다. 사회적 편견 탓도 있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에서 적극 나서는 이유다. 국제구호 NGO인 ‘기아대책’과 롯데백화점은 우울증에 관심을 갖고 인식 개선을 위한 ‘리조이스’ 캠페인을 2017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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