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550만 핀란드, 40만이 우울증약…극단 선택 절반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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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에서 2017년 연간 캠페인으로 진행한 '우울증 : 렛츠 토크' 포스터. [사진 WHO 홈페이지]

WHO에서 2017년 연간 캠페인으로 진행한 '우울증 : 렛츠 토크' 포스터. [사진 WHO 홈페이지]

마음의 병, 우울증 ④

"우울증 같은 정신 건강 문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들에 대해 말하길 꺼리는 건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도움받는 것조차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공공 정신 건강 전문가인 마크 반 오머런 박사는 ‘마음의 감기’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전세계 3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우울증과 싸우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울증을 이겨내려면 병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하다. 그는 "많은 나라가 정신 건강 이슈에 대해서 좀 더 개방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 이는 매우 좋은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30일 중앙일보와 e메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다. WHO 정신건강ㆍ약물남용 부서 소속인 오머런 박사는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어드바이저’(고문) 역할을 맡고 있다.

전세계 3억명 이상이 우울증 고통 #WHO 전문가 "의사에 도움 구해야" #2년 전 '터놓고 얘기합시다' 캠페인 #뉴질랜드 TV 골든타임에 공익광고 #온라인 정신 건강 포털 통해 치료도 #정신질환 편견 깨는 데 국가가 나서

오머런 박사는 우울증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개인과 사회 모두에 커다란 문제가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는 "우울증 증세를 무시하면 사람들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것이다"면서 "엄청난 고통을 일으키고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지며, 무단 결근을 하게 될 수 있다. 가장 심한 경우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피하려면 "우울증 증세가 있는 사람들이 건강 관리 전문가(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밝혔다. 혼자 삭이고 숨길 게 아니라 빨리 병원을 찾고 치료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WHO 공공 정신 건강 전문가인 마크 반 오머런 박사. [사진 WHO]

WHO 공공 정신 건강 전문가인 마크 반 오머런 박사. [사진 WHO]

우울증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오머런 박사는 "여러 국가의 의료 종사자들이 환자들에게서 정신 질환 초기 징후를 찾고 그 뒤에 필요한 조치를 조언하도록 훈련받는다"면서 "WHO는 학교ㆍ대학ㆍ고용주들이 학생과 직원들의 정신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점점 더 노력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WHO 역시 직접 팔을 걷고 정신질환 인식 개선에 뛰어들고 있다. 2017년 연간 캠페인으로 실시한 '우울증 : 렛츠 토크'가 대표적이다. 두꺼운 편견과 차별을 뚫고 자신의 질병을 말하는 것이 치료와 회복의 첫걸음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선진국에서는 우울증을 전 사회적인 이슈로 끌어올리고 정부가 나서 치료를 권한다. 한때 ‘자살 공화국’이란 오명을 얻었던 핀란드는 1990년대 초반 우울증 조기 발견ㆍ치료 같은 전방위적 대책을 시행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핀란드 공영방송 ‘YLE’에 따르면 해마다 국민 550만명 중 7.4%가 우울증을 겪는다. 연 40만명 이상이 항우울제 처방을 받는다. 약 사용자의 50~70%는 우울증 환자이고, 나머지는 불안 장애나 불면증 등을 치료하기 위한 것으로 조사됐다. 정신과 진료에 거부감이 없다는 의미다. 그 덕분에 1990년 인구 10만명당 30명까지 치솟았던 핀란드 자살률은 13.8명(2016년)으로 줄었다.

핀란드 정부는 디지털 공간도 적극 활용한다.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방 환자 등을 고려해 '멘탈 허브' 포털을 운영한다. 여기에서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설문지와 가까운 의료 서비스 기관 정보, 심지어 온라인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뉴질랜드에서 정신질환 인식 변화를 위해 진행하는 '라이크 마인즈, 라이크 마인' 프로그램의 온라인 캠페인. [유튜브 캡처]

뉴질랜드에서 정신질환 인식 변화를 위해 진행하는 '라이크 마인즈, 라이크 마인' 프로그램의 온라인 캠페인. [유튜브 캡처]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박종익 강원대 교수팀)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는 ‘비욘드블루’(Beyondblue)라는 프로그램이 대국민 인식 개선에 앞장선다. 2000년 정부 재정 지원을 받아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바꾸고자 처음 제작됐다. 공익 광고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유명인들이 우울증을 경험했던 사례를 소개한다. 임산부와 노인, 청소년은 물론이고 성적 소수자를 위한 맞춤형 정보도 제공한다. 호주 정부는 2016~2017년 정신 건강 분야에만 91억 달러(약 10조6000억원)를 쏟아부었다. 2017~2018년 2년간 정신질환 관련 처방이 420만명에게 이뤄졌다.

뉴질랜드는 ‘라이크 마인즈, 라이크 마인’(Like Minds, Like Mine) 프로그램이 23년째 이어지고 있다. 정신질환을 경험한 유명인과 일반인이 자신의 삶에 관해 설명하는 식이다. TV 골든타임에 내보내는 공익 광고 캠페인이 유명하다. 그중 잘 알려진 메시지다. "5명 중 1명이 정신질환에 걸릴 수 있는데 그들이 얼마나 힘든가는 바로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셨나요?" 영국에선 정부와 자선단체가 손을 잡고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정신질환자와 일반인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우울증을 극복한 스포츠 스타의 고백을 다룬 호주의 우울증 인식 개선 캠페인 영상. [유튜브 캡처]

우울증을 극복한 스포츠 스타의 고백을 다룬 호주의 우울증 인식 개선 캠페인 영상.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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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내에선 우울증 등 정신질환에 초점을 맞춘 공익 캠페인이나 시민운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롯데백화점이 2017년부터 여성 우울증 인식 개선을 위해 진행해온 '리조이스 캠페인' 등 일부 기업이나 단체만 나서는 상황이다. 우울증 진단·치료를 동네 의원급에서부터 활성화할 대책도 잘 보이지 않는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처럼 질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스스로 치료 의지가 낮을 경우엔 정부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회복하기 어렵다. 정부가 개인과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럽은 1차 의료가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정신과 전문의와 적극적인 협력 관계를 맺는다. 반면 국내에선 일반 의사와 정신과 의사 사이에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정신건강 의료 체계를 개선해야 우울증을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에스더ㆍ황수연ㆍ정종훈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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