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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 논설위원이 간다

몸값 낮춘 변호사, 세무사·법무사와 일감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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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등록 변호사 3만 명 시대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세무사법 개정안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해 피켓 시위를 하는 변호사들. 법안이 변호사에게 회계 장부 작성 업무를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게 대한변협의 주장이다. [뉴스1]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세무사법 개정안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해 피켓 시위를 하는 변호사들. 법안이 변호사에게 회계 장부 작성 업무를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게 대한변협의 주장이다. [뉴스1]

서울 역삼동에 있는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사무실에서는 지난 18일 ‘조촐한’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등록한 변호사의 번호가 ‘30000’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려면 변협에 반드시 가입하고 등록해야 한다. 1번에서 출발한 등록번호가 3만에 이르게 된 역사적인 날을 축하한 것이다. 3만 번째 등록의 주인공은 이정민(28) 변호사다. 그는 지난 4월 합격자를 발표한 8회 변호사 시험 출신이다. 예상치 못했던 축하에 이 변호사는 “등록 변호사가 3만 명이나 된 사실은 미처 몰랐다. 로스쿨 도입 이후 변호사가 많이 배출됐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이찬희 변협 회장은 갓 등록한 후배에게 변호사 배지를 달아주고 축하 꽃다발을 전했다.

변협, 이달 3만 번째 변호사 등록 #변호사 급증에 유사 직역과 갈등 #“비용과 전문성으로 경쟁하자” #젊은 변호사들 콘텐트 차별화해야

변협이 이날 행사를 널리 알리려 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었다. 3만 번째 등록 회원 탄생을 축하하는 동시에 변호사 수의 급격한 증가를 환기하는 것이다. 등록 번호 3만 명 시대 변호사 업계의 속사정을 들어 봤다.

1만까지 100년, 5년 만에 1만 명 늘어

현재 활동 중인 변호사가 3만 명은 아니다. 등록 변호사에는 이미 작고한 사람도 포함돼 있다.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활동 중인 변호사는 약 2만5000명이고, 국회의원이나 경력 법관 등 변호사 업무를 쉬고 있는 이들까지 합치면 2만8000명 정도다.

등록번호 1번은 1906년에 등록한 고(故) 홍재기(1873~1950) 변호사다. 1만 번은 2006년에 나왔다. 약 100년이 걸렸다. 2만 번째 등록 변호사는 8년 만인 2014년에 탄생했고, 3만 번은 5년 만에 도달한 것이다. 이찬희 회장은 “변호사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반면 사회의 시스템은 과거 법조인 양성 체계에 머물러 있다. 업계의 위기가 가중되는 이유다”고 말했다.

이찬희 대한변협 회장(왼쪽)이 3만 번째로 등록한 이정민 변호사를 축하하고 있다. [사진 변협]

이찬희 대한변협 회장(왼쪽)이 3만 번째로 등록한 이정민 변호사를 축하하고 있다. [사진 변협]

3만 번째 변호사를 공론화한 이유는.
“후배를 축하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소수 엘리트 법조인만 육성하던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서 위기 상황을 만들고 있다. 사법시험에 붙으면 ‘개천의 용’이 되고 집중 지원을 받던 시대에는 법조인 수가 너무 적어서 국민의 법률 수요를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생겨난 게 변호사 ‘유사 직역’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변호사의 생존을 위협한다.”
유사 직역이 왜 문제인가.
“변협의 최대 현안이다. 원래 변호사가 해야 하는 일인데 세무사, 법무사, 변리사, 손해사정사, 행정사 등 수많은 유사 직역이 만들어졌고, 각 직역이 기득권이 됐다. 변호사들이 송무(訟務)만으로도 먹고 살 때는 방치됐다. 지금은 사건 수도 줄었다. 인구가 줄고 결혼이 주니 이혼 사건도 줄었다. 과거의 왜곡된 유사 직역 시스템은 그대로인데 사건은 줄고 변호사는 급증했다. 유사 직역이 없다면 3만 명 변호사가 많은 숫자가 아니다.”

변협은 지난 4일 국회 앞에서 궐기대회를 했다. “세무사법 개악에 반대한다”며 수십명의 변호사들이 피켓 시위를 했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가 2004~2017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에게 세무사 자격을 주되 세무대리 업무는 할 수 없도록 한 세무사법 규정을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 국회가 만든 개정 법안에 위헌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개정안은 세무사 자격을 지닌 변호사에게 회계 장부 작성(기장 대리)과 성실 신고 확인 업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변협은 “위헌적인 세무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서는 안 되며, 그럴 경우 위헌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다.

‘유사직역과의 전쟁’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변협은 지난 10일에는 법무사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집회도 국회 앞에서 열었다. 법무사에 개인회생·파산 사건 대리를 허용하는 법무사법 개정안이 변호사 대리 원칙을 침탈하고 국민 권익을 무시한다는 주장이다. 10여 년 전부터 비슷한 요구가 있었지만, 최근엔 그 강도가 과거보다 강해졌다. 이 회장은 “변호사들에게 새로운 직역으로 진출하라고 하는데, 종전에 할 수 있었던 일도 이렇게 저항이 심한데 새로운 영역은 또 얼마나 큰 저항이 있을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변호사 밥그릇 챙기기라는 시각이 있다.
“원래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매년 2000명 가까운 변호사가 새로 배출된다. 올 초 변협 회장 선거 운동 때 전국 투표소를 일일이 방문했는데 변호사 사무실에 가면 눈물이 날 정도다. 비용을 아끼려고 사무실도 없이 원탁에 앉아 일하는 변호사들이 허다하다. 어떤 젊은 변호사들은 법조브로커 같은 사무장에게 고용 당해 일하는 듯한 현실도 봤다. 사무장은 방이 있는데 변호사는 방이 없더라.”
젊은 변호사들이 그런 요구를 하나.
“요즘 30, 40대 변호사의 이력서가 나보다 더 화려하다. 직장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노동력 착취 현상도 있다. 로스쿨을 도입할 때 변호사 유사 직역 정비를 전제로 해야 했는데, 정치적 빅딜로 도입되다 보니 젊은 변호사의 상황은 더 열악해졌다. 로스쿨 출신이 순식간에 변호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시뮬레이션도 없이 제도만 도입한 셈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변호사 단체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다. 협회의 힘도 더 세질 것으로 생각한다.”
유사 직역 역시 생존을 위협받는 것 아닌가.
“위기감을 느끼겠지만, 경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변호사는 법률 전문가이며 고급 서비스를 제공한다. 과거엔 비용이 수백만 원이었지만, 이제는 몇십만원에도 그 일을 하겠다는 변호사가 있다. 비슷한 비용으로 변호사가 제공하는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산업계에서 기술이 더 좋아졌는데 가격은 싸지는 현상과 비슷하다. 비용과 전문성을 따져서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국민을 위하는 것 아닌가.”

전문 분야 발굴이 살길

젊은 변호사들도 위기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도 ‘열정 페이’라는 말이 나온다. 송무가 아닌 다양한 일자리로 진출하는 변호사도 늘고 있다. 변협은 기업 사내 변호사로 활동하는 변호사 수를 4000~7000명으로 추산한다. 이직이 잦고 중소기업 등의 고용 정보는 취합이 안 돼서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등록번호 3만번의 이정민 변호사도 최근 식품 대기업인 신세계푸드의 사내 변호사로 입사했다. 그는 젊은 변호사들이 직면한 현실에 대해 “도전적이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배 변호사들의 시대가 부럽지 않은가.
“변호사 수가 많지 않던 예전이 지금 상황보다 더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많은 변호사가 배출되는 우리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로스쿨 도입 취지가 더 많은 국민이 법률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니까 취지에 맞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변호사들도 호의호식을 바라기보다는 전문성 개발에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이제 (변호사) 자격증 하나 가진 것이고, 이걸 바탕으로 차별화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대학 학부에서 교육학을 전공할 때 배운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평생 학습하는 인간)’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법령 개정 등 변화에 맞춰 계속 배워나갈 생각이다. 블록체인 기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식품유통 기업에 활용도가 높다는 점을 고려해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설지혜

설지혜

법무법인 화우의 설지혜 파트너 변호사는 “등록 변호사 3만 시대에는 자기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생존과 성공의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쟁력의 원천은 법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실무 경험을 기반으로 하면서 차별화되는 콘텐트다. 변호사로서 경력을 시작할 때 자신만의 콘텐트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탐색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찬희 변협 회장은 과거보다 서글픈 현실에 선 후배들에게 이런 생존법을 제안했다. “저 멀리 선배들이 누리던 것만 보고 현실에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발아래를 보면서 앞으로 한발 한발 가다 보면 목적지에 갈 수 있다.”

김승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