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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북한 연출, 조총련 주연, 일본 정부 조연의 ‘거대 사기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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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60주년 맞아 되짚어본 재일교포 북송사업 

1959년 12월 14일 북송 재일교포 1진을 태우고 일본 니가타 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소련선박 트보르스크. 이 날부터 1984년까지 9만3000여 명의 재일교포가 니가타 항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갔다. [중앙포토]

1959년 12월 14일 북송 재일교포 1진을 태우고 일본 니가타 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소련선박 트보르스크. 이 날부터 1984년까지 9만3000여 명의 재일교포가 니가타 항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갔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이달 초 도올 김용옥의 『통일, 청춘을 말하다』란 책을 읽고 난 뒤 국민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유시민의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에 출연하여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대통령의 추천에 따라 이 책을 사 읽다가 84쪽에서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몇 번을 반복해 읽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친 고용희가 재일교포 출신이란 점을 얘기하던 중 나오는 대목이다.

문대통령 추천한 도올 저서엔 #‘더 도덕적, 더 매력적인 북한 선택’ #‘지상낙원’ 믿고 갔다 비참한 삶 # 9만여 피해자의 아픔엔 왜 눈감나

▶유시민=“북송선을 탄 사람들이 대부분 고향이 남쪽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대거 북한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김용옥=“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북송선에 전혀 강제성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냉전체제 하에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진 유일한 사례라고 하죠. (중략)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사회가 남한 사회보다 더 도덕성이 있었고, 삶의 조건도 더 매력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이죠. 이런 역사를 우리는 객관적으로 반추해봐야 합니다.”

▶유시민=“아∼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군요.”

북송 교포들의 선택은 지역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조총련 간부들의 독촉 내지 강권이 일부 있었다고는 해도 형식상으로는 ‘자발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신생 사회주의 조국 건설’의 일원이 되겠다는 사명감 내지 애국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절대다수는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교육과 의료비가 전액 무상이란 선전에 혹해 생면부지의 땅으로 갔다. 도올의 말처럼 교포들이 찾아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더 도덕적이고 매력적인 나라’였을까.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북한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북송은 설령 강제동원은 아니었다 해도 그 본질은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북송 교포 출신의 탈북자 몇 사람만 만나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북송 재일교포 탈북자와의 인터뷰

북송선 출항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의 기사에는 ‘희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도쿄의 재일 한인역사자료관 전시물. 예영준 기자

북송선 출항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의 기사에는 ‘희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도쿄의 재일 한인역사자료관 전시물. 예영준 기자

만 60년 전인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을 태운 제1차 귀국선이 일본 니가타(新潟) 항을 출발해 청진으로 향했다. 북한이 ‘귀국사업’이라 부른 북송의 시작이었다. 1984년까지 모두 9만3339명이 북송선을 탔다. 초기이던 1960년 36차 북송선에 고지(高知)현의 교포 2세 소년 문주현(현재 7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2000년 탈북해 서울에 살고 있는 문씨를 17일 만났다.

“북한은 돈이 필요 없는 사회라고 선전해서 그렇게 믿었다. 누구나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만큼 갖고 나와 먹고 쓰는 사회인 줄 알았다. 그런 믿음은 청진항 도착 순간부터 깨졌다.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는 시내 모습, 환영나온 학생들의 행색이 일본과는 너무 달랐다. ‘잘못 왔다’며 당혹해 하던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북한으로 간 것을 후회하며 살았나.
“나는 수영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 북한행에 반대했는데 아버지는 ‘조국에서 수영하면 된다’고 했다. 웬걸, 청진은커녕 평양에도 수영장이 없었다. ‘나를 왜 데리고 왔나’고 원망하며 한 달 동안 아버지와 말을 안 한 적도 있다. 아버지도 후회 속에 살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어디 가 하소연할 데도 없으니 네가 이해하고 용서하라’던 어머니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활은 어땠나.
“그나마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고생을 덜 하고 잘 산 축에 속한다. 어머니가 갖고 간 일본제 세이코 시계 50개 덕분이다. 생활이 쪼들릴 때마다 그것을 간부들이나 군 장교들에게 몰래 팔았다. 사무직으로 일하던 아버지 월급이 1원 60전이던 시절 북한 돈 300원을 받았다. 어머니는 ‘지상낙원이라고 해서 왔더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일해 번 물건을 팔고 살아야 하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50개가 다 떨어진 뒤로는 일본에 남은 친척이 방문단으로 올 때마다 시계를 갖다 줬다. 교포들 중에는 모든 게 무상이란 말만 믿고 이불조차 안 갖고 온 사람들의 생활은 정말 비참했다.”
재일교포는 북한에서도 차별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1976년 무렵부터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이 많다. 김일성 사진이 있는 신문을 접어서 보관했다는 등의 이유였는데 나도 아오지 탄광으로 가서 제탄공으로 일했다. 일본에 남아 있던 친척 중에 조총련 간부를 하던 분이 1980년 평양 ‘광복거리’ 조성 사업을 할 때 일본 돈 1000만엔을 기부하고 우리 가족의 행방을 물어 아오지까지 찾아왔다. 그 때 100만엔을 주면서 ‘곧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한두 달 뒤 청진으로 돌아왔다.”
연도별 북송 인원수

연도별 북송 인원수

문씨의 증언은 대전에 사는 이창성씨나 서울에 살다 별세한 오수룡씨 등 필자가 접한 다른 재일교포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과 대동소이하다. 지금까지 재일교포 탈북자 200여 명이 일본으로 돌아갔고, 한국에는 그보다 약간 적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북송사업에 협력했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국교가 없던 북한과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양측 적십자사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북송사업이 진행됐다.

소수 민족으로서는 과도하게 높은 재일교포의 존재에 부담을 느낀 일본 정부는 북송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내각의 1959년 결정문에는 “재일 조선인은 치안상 문제가 되고,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치안·재정 부담이란 당시 재일교포의 생활보호대상자 비율(4명에 1명꼴)이 일본인의 8배에 이르고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 언론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 당국의 초청을 받고 현지 취재를 한 일본 기자들은 북한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 돌아와 ‘지상 낙원’ 선전에 동조하는 듯한 내용의 르포기사를 쏟아냈다.

북한의 실상은 언론이 아니라 문씨의 부친처럼 ‘속았다’고 깨달은 교포들이 일본에 남아 있던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졌다. 북한 당국의 검열을 거쳐 배달된 편지는 “듣던 대로 조국은 지상 낙원이다”는 찬양 일색이었다. 하지만 남은 가족들은 사전 약속한 암호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한 뒤 편지를 세로쓰기로 보내면 남은 식구들도 하루빨리 귀국선을 타고, 가로쓰기로 보내면 절대 오지 말라.” 불행히도 남은 가족들이 받은 편지는 가로쓰기였다. 이런 편지도 있었다. “여기서의 생활은 일본의 ○○○처럼 풍요롭다.” 편지에 쓰인 ○○○는 일본 빈민가 지명이었다.

북한에서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어떻게 알려져 있을까. 태영호 전 주영북한대사관 공사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동서 체제 경쟁이 치열하던 시절,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체제 우월성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다. 같은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내면 이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이 북송을 적극 지원하게 된 것이다. 교포들이 타고 간 귀국선도 소련 배였다. 하지만 북한에서 재일교포들은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지식인 출신도 행정직 정도에 그치고 당 일꾼이 되기는 어려웠다. 내가 일하던 외무성에도 재일교포는 없었다. 자본주의 생활 경험 때문에 김일성 유일영도체제를 잘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친구 중에도 교포가 있었는데 북한식 회의 방식에 적응 못 하고 자기 의견을 솔직히 이야기하다 주의를 받곤 했다.”

요컨대 북송사업은 체제 우월성을 국제적으로 과시하고 싶었던 북한과 조총련, 범죄율 높고 사회주의에 경도된 잠재적 위험집단을 ‘정리’하고 싶었던 일본 정부가 주범과 종범, 공범으로 가담해 벌어진 ‘사기극’이었다. 북한의 선전에 속고 교묘하게 연출된 집단광기에 휘말려 돌아오지 못할 해협을 건넌 9만3000명은 거대 사기극의 피해자였다. 그들의 굴절된 삶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라도 있다면 도올과 같은 발언을 공공연히 하진 못할 것이다.

비단 북송사업에 관한 기술뿐 아니라 도올의 저서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북한에 도덕적 우위를 두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언술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개인이 어떤 역사관을 갖고 어떤 책을 쓰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역사관에 바탕을 둔 저서를 두고 “우리의 인식과 지혜를 넓혀주는 책”이라는 문 대통령의 추천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백번을 양보해도 북송사업에 대한 기술만은 ‘사람이 먼저’라는 대통령이 추천할 대목이 아니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