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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을 닮았다, 세계적인 작가 제니 홀저가 전하는 경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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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그의 손에서 예술이 되다  

세상에 이런 아티스트가 있다. 40여년간 작품을 위해 그가 쓰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물감이 아니라 글귀다. 우리가 매일 하는 말, 쓰는 말, 읽는 말, 듣는 말, 주고받는 말, 마음에 새기는 말…. 우리가 문장. 텍스트(text)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줄기차게 '문장'을 가지고 작업해온 작가, 세계적인 개념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69) 얘기다.

세계적인 개념미술가 제니 홀저 신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과천관서 공개 #작가 최초로 제작한 한국어 텍스트 주목 #서울관 LED 사인 '당신을 위하여'도 공개

그는 자신이 관심을 가진 사회·정치적 문제와 개인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다루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미술적인' 방식으로 펼쳐 보인다. 티셔츠, 모자 등과 같은 일상생활 용품에서부터 석조물, 전자기기, 건축물, 그리고 자연 풍경에 그는 글귀를 풀어놓는다. 언어가 그의 물감이라면 다양한 사물과 공간이 그의 캔버스가 되는 셈이다.

세계에서 주목받는 홀저의 신작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과천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놓인 곳은 전시장 안이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로비, 과천관 야외 공간의 석조 다리 위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이 2017년에 작가에게 의뢰해 준비해온 커미션 프로젝트다.

그중에서도 과천관 야외 석조 다리 난간 위에 손보인 작품은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이란 제목의 작품. 홀저가 오랫동안 작품으로 선보여온 경구에서 고른 11개의 것들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묘비명은 아니지만 묘비명을 닮았습니다

홀저는 1986년부터 대리석, 화강암과 같은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벤치와 석관에 글자를 새겨넣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묘비명은 아니지만 어딘가 묘비명을 닮았다. 돌에 묵직한 내용의 짧은 문장을 새겨 넣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람객들이 짧은 문장을 읽으며 사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내용은 "따분함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 "고독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 "당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들어라"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똑같이 양육하라"등등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데 대해 홀저는 "돌에 새겨진 글자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차갑고 단단한 촉감을 느끼고 읽을 수 있으며, 종이에 인쇄된 글자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번에 다리 위에 새겨진 11개의 경구 중 5개는 영어로, 6개는 한글로 쓰여 있다. 미술관의 영구 설치작품으로 과천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공원과 같은 야외 공간을 산책하며 홀저가 새긴 경구를 찬찬히 읽고 음미할 수 있다.

홀저가 고른 경구는 다음과 같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 지나친 의무감은 당신을 구속한다(A STRONG SENSE OF DUTY IMPRISONS YOU)

  2. YOU ARE GUILELESS IN YOUR DREAMS(사람은 꿈속에서 솔직하다)

  3. 따분함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BOREDOM MAKES YOU DO CRAZY THINGS)

  4. SOLITUDE IS ENRICHING (고독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5.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REMEMBER YOU ALWAYS HAVE FREEDOM OF CHOICE)  

  6. YOU ARE THE PAST PRESENT AND FUTURE(당신은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7. 가질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이다(THE UNATTAINABLE IS INVARIABLY ATTRACTIVE)  

  8. LISTEN WHEN YOUR BODY TALKS(당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들어라)

  9. 모든 것은 미묘하게 서로 연결돼 있다(ALL THINGS ARE DELICATELY INTERCONNECTED)  

  10. RAISE BOYS AND GIRLS THE SAME WAY(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똑같이 양육하라)  

  11. 당신의 모든 행동이 당신을 결정한다(THE SUM OF YOUR ACTIONS DETERMINES WHAT YOU ARE)  

제니 홀저. [사진 뉴시스]

제니 홀저. [사진 뉴시스]

홀저는 왜 이런 작업을 할까?

홀저는 당초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단어와 언어를 예술 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얻은 아이디어를 간결한 문장과 문구로 단순화하고 맨해튼 주변에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짧고 간결한 문장을 작품에 즐겨 써왔다.

홀저는 “사람들을 눈길을 잡는 데 몇 초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할 수는 없지만 내 목표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읽고, 보고, 웃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책에서나 볼 법한 문장, 묘비명에서나 접할 글귀를 도시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환경에 놓음으로써 사람들이 글귀를 매개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어떤 글귀는 너무 흔하거나 뻔하고, 어떤 글은 묵직한 여운을 남겨 오래 곱씹게 된다.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 

홀저의 작업은 석조 다리에 새긴 11개의 경구에서 끝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로비 벽면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수놓은 종잇장들도 그의 작품이다. 초기 작품 '경구들(Truism)'(1977~79)과 '선동적 에세이(Inflammatory Essays)'(1977~82) 포스터 1000여장을 벽보처럼 붙여놓은 것이다.

'경구들'(1977~1979)은 홀저가 1977년 참여했던 휘트니미술관 독립 연구프로그램에서 론 클라크가 제공한 추천 도서 목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을, 복잡하고 어려우며 논란의 소지가 있는 아이디어를 간결하고 직접적인 발언으로 정제했다.

이번 작가의 언어를 한글로 적절하게 풀고 담아내기 위해 한유주(소설가·번역가)와 타이포 디자이너들이 협업했다.

로봇 LED 사인 '당신을 위하여'(2019)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그러나 홀저가 서울관에서 공개한 작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약 16m 높이의 서울박스 천장에 매달린 LED 로봇 사인 '당신을 위하여'란 작품이다. 천장에 매달린 6.4m의 직사각형 기둥엔 김혜순 시인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시들과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중 '거울 저편의 겨울 11'에서 발취한 시 등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엄마의 쌀독엔 쌀이 없고/엄마의 지갑엔 돈이 없고/엄마의 부엌엔 불이 없고/…/네 엄마는 네 아잇적 그 강기슭/네 엄마는 네 아잇적 그 오솔길/강기슭 지나 그 오솔길 너 혼자 멀어져 가노라면/우리 딸이 왔구나 힘없는 목소리/어서 들어오너라 방문 열리면/텅 빈 아궁이 싸늘한 냉기…" (김혜순, '저녁메뉴'. 시집 『죽음의 자서전』중에서)

"비 내리는 동물원 철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어린 고라니들이 나무 아래 비를 피해 노는 동안/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어미 고라니가 있었다/사람 엄마와 아이들이 꼭 그렇게 하듯이/…/아직 광장에 비가 뿌릴 때 /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한강. '겨울 저편의 겨울 11',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중에서) 

여기에 흐르는 문장들은 김혜순, 한강, 에밀리 정민 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호진 아지즈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문장을 골랐다.

LED 로봇 사인 '당신을 위하여' 앞에 선 제니 홀저. 이 조명판에는 김혜순, 한강 등 여성 작가 5인의 작품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쉼없이 흐른다. [사진 이은주 기자]

LED 로봇 사인 '당신을 위하여' 앞에 선 제니 홀저. 이 조명판에는 김혜순, 한강 등 여성 작가 5인의 작품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쉼없이 흐른다. [사진 이은주 기자]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자신의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 포스터로 구성된 작품 앞에 선 제니 홀저. [사진 이은주 기자]

자신의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 포스터로 구성된 작품 앞에 선 제니 홀저. [사진 이은주 기자]

홀저는 1990년 제44회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을 대표하는 첫 여성 작가로 선정됐으며 그해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이후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빌바오), 휘트니 미술관, 루브르 아부다비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작업을 선보여왔다.

전시 공개에 앞서 한국을 방문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을 찾았던 그는 "원래 꿈은 추상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했다"며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콘텐트를 보여주고 싶었다. 예술계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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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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