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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가의 딜레마를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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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경진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만 4년 머물던 베이징을 곧 떠난다. 애정을 품고 중국을 관찰했다. 변화무쌍한 시절이었다. 부임 때 없던 공유 자전거가 중국을 뒤덮었다. 색깔과 주인이 바뀌었다. 폐자전거 철재가 항모 여러 척을 이뤘다. 무현금 사회를 넘어 무인 서비스도 낯설지 않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의 말처럼 “무일푼 지갑을 걱정하지 않고 휴대폰 배터리 잔량만 걱정한” 생활이었다. 시차 없는 중국의 시간은 빨리 흘렀다.

언제부터 중국 앞에 투키디데스 함정과 중진국 함정이 도사린다고 한다. 떠나기에 앞서 스토리텔링의 달인 사마천(司馬遷)과 장이머우(張藝謀)가 들려준 자객 형가(荊軻)의 이야기에서 해법을 떠올렸다.

“쓸쓸히 부는 바람아 역수가 차갑구나, 장사가 한번 떠나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진(秦)왕 영정(嬴政)을 찾는 형가는 비장했다. 손에는 진을 배신한 번오기(樊於期)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요충지 독항(督亢)의 지도가 들려 있었다. 영정에게 안내하는 통행증이었다. 거사에 실패한 형가는 “일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대를 사로잡으려 했기 때문이었다”며 망설였음을 토로했다. 사마천은 “형가는 진왕을 상처입히지 못했다”면서도 “뜻이 분명했고 의지에 충실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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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머우는 영화 ‘영웅(英雄·2002년 작)’에서 형가의 망설임을 새로 해석했다. 천하를 앞세워 전란을 끝내도록 진왕을 살렸다는 황제 옹호론이다. 임무를 완수하면 세상이 도탄에 빠지고, 실패하면 ‘평화’가 오는 역설이다. 형가의 딜레마라 부를 만하다.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는 『중국 현대 사상사론(1987)』에서 “계몽(啓蒙)과 구망(救亡)의 이중 변주”라는 틀로 중국 역사를 해석했다. 자유와 인권, 민주를 추구한 계몽은 망국의 위기 앞에서 구망을 이길 수 없었다. 전통시대 황제의 효율적인 독재에 유리한 군현제가 유교의 이상 정치인 봉건제에 우세했던 것과 같다. 백성은 늘 ‘선의의 독재자’에 만족했다. 홍콩의 민주가 베이징의 애국에 압도당하는 요즘과 맥락이 같다.

하지만 중국에서 정치는 군현과 구망이 이겼어도 정신은 계몽과 봉건이 앞섰다. 봄가을로 나라의 존망이 바뀌던 춘추시대에 제자백가가 꽃피었고, 20세기 전반 군벌과 일제의 횡포 속에서 호적, 진인각, 노신 등 걸출한 문인이 나왔다. 황제의 부재(不在)가 준 선물이었다.

형가의 딜레마는 자라나는 중국 신세대가 제3의 해법을 찾아 극복할 터다. 중국 문화에 내재한 말랑말랑한 힘(軟實力)이라면 불가능한 임무만은 아닐 것이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