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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는 로컬이잖아" 입담 터진 봉준호가 주워담아야 할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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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아카데미)는 국제영화제가 아니지 않나. 매우 ‘로컬’(지역적)이니까("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

"오스카는 국제영화제 아니라 로컬"로 화제 # 미 잡지 "감독 본인이 록스타급 반열 인기" #상당한 수준 영어 구사…특유의 유머 빛나

지난 10월 7일(현지시간) 봉준호 감독이 미국 매체 ‘벌처’와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을 했을 때, 그 자신도 예감 못했을 거다. 내년 2월 열리는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앞두고 ‘기생충’이 이처럼 주목받는 후보작이 될 거란 것을.

‘기생충’은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16일(현지시간) 발표한 9개 부문 예비후보 명단(쇼트리스트) 가운데 최우수 국제영화상(Best International Feature)과 주제가상(Original Song) 부문에 포함됐다. 최우수 국제영화상은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의 바뀐 이름이다. 이날 발표된 10편 가운데 최종 후보 5편은 내달 13일 작품상‧감독상 등 본상 후보작과 함께 공개된다.

11월 3일 열린 할리우드 필름 어워즈(HFA)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상을 받고 인삿말을 하는 봉준호 감독. [로이터=연합뉴스]

11월 3일 열린 할리우드 필름 어워즈(HFA)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상을 받고 인삿말을 하는 봉준호 감독. [로이터=연합뉴스]

‘기생충’은 제72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필두로 지금까지 총 58개 영화제‧시상식에 초청돼 36곳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흥행 성적도 좋아서 지난 주말까지 북미 개봉 66일간 총 2035만 달러(약 238억원)를 벌어들였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기록은 물론 현지 외국어영화 역대 흥행작 중 11위에 해당한다.

미국 현지에선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여부 못지않게 봉준호 감독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봉준호란 감독의 인기가 ‘기생충’에게 아카데미 보험이 돼주는 격”이라고 미국 잡지 '배니티 페어'가 묘사할 정도다. 잡지는 "영어로 된 작품들(설국열차·옥자)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히트한 괴물·마더 등으로 인해 봉 감독 본인이 록스타급 반열에 있다"고도 했다.

특히 현지 매체들과 인터뷰에서 특유의 달변과 유머를 구사하는 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근엔 지난 10일 미 지상파 방송 NBC TV의 대표 토크쇼인 ‘지미 팰런의 투나잇쇼’ 출연분이 유튜브 등을 통해 화제가 되고 있다. 베테랑 진행자 팰런이 “토크쇼에 나왔으니 줄거리에 대해 살짝 공개해야 하는 건 일종의 의무”라며 스포일링(영화 주요 스토리를 미리 노출)을 요구하자 봉 감독은 “이 자리에서는 되도록 말을 안 하고 싶다. (관객들이) 스토리를 모르고 가야 더 재미있을 것 아니냐”며 능청스레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이건 가족 얘기다. 가난한 가족의 아이가 부잣집에 과외수업하러 가면서 벌어지는 얘기"라고 소개한 뒤 영어로 “휴먼 스토리이면서 웃기고(funny), 무서운(scary) 영화”라고 덧붙였다. 지미 팰런쇼 유튜브엔 봉 감독 말에 호응하듯 “마케팅팀에겐 딜레마겠지만, 이 영화에 대해선 ‘그냥 무작정 가서 봐라’라고 말하고 싶다” 등의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대학생 때 과외, 두 달 만에 안 잘렸으면…”

봉 감독은 지난달 연예매체 ‘데드라인’ 주최로 열린 ‘더 컨텐더스 LA’ 행사에선 이번 영화 모티브를 자신의 대학생 때 과외 경험에서 얻었다고 밝혔다.

“중학생 남자애를 가르쳤는데,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 애가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엄마 아빠 얘기를 하던 것”에서 상류층 삶을 착안했다는 얘기다. 그는 이 영화가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infiltration),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에 관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두 달 만에 잘리지 않았으면 그 가족에 관한 더 많은 깊숙한 얘기까지 알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정-기우 남매를 연기한 박소담(왼쪽)과 최우식. [사진 NEON=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에서 기정-기우 남매를 연기한 박소담(왼쪽)과 최우식. [사진 NEON=연합뉴스]

봉 감독의 발언이 미 현지에서 호감을 얻는 배경엔 비교적 원활한 영어 구사력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질문을 바로 알아듣는 수준이며, 짧은 대답은 영어로 직접 하되 길고 까다로운 답변만 배석한 통역이 영어로 옮기는 식이다. 칸 영화제 등 주요 행사에서 봉 감독의 영어 통역을 도맡아온 최성재(샤론 최)씨는 한국 국적으로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한다.

특유의 유머와 겸손한 화법도 돋보인다. ‘데드라인’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광대 없는 희극, 악당 없는 비극(a comedy without clowns and tragedy without villains)’이라고 묘사했다”고 질문자가 운을 떼자 봉 감독은 “한국에서 마케팅 팀이 써달라고 해서 열심히 쓴 것이긴 한데, 좀 느끼하죠(cheesy)?”라고 말해 웃음을 유도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히어로인지, 누가 빌런(악당)인지 좀 애매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해 영화의 깊이 있는 이해를 도왔다.

“한국 영화 추천작 수백편 중에 꼽으라면…”

미국에서 연일 영화상 수상 소식을 전해오고 있는 봉준호 감독. [AP=연합뉴스]

미국에서 연일 영화상 수상 소식을 전해오고 있는 봉준호 감독. [AP=연합뉴스]

짧은 인터뷰 때도 ‘꼭 해야 할 말’을 놓치지 않는다. 미 공영라디오(NPR) 인터뷰 땐 “(올해로) 한국 영화 역사가 100년이고 숱한 거장들이 있다. 추천작이 200개, 300개에 이르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 2개만 추천하겠다”면서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언급했다. 1960년작 ‘하녀’는 봉 감독 스스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고전이고, ‘밀양’은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점에서 ‘기생충’의 선임자로 꼽힐 수 있다.

앞서 지난 10월 봉 감독을 인터뷰한 뉴미디어 전문지 ‘벌처’의 질문은 “한국 영화가 지난 20년간 (세계) 영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되지 않은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느냐”였다. 봉 감독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상하긴 하지만, 별 일도 아니다”면서 오스카를 ‘로컬 영화제’로 규정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관련 트윗이 수천회 이상 리트윗 되면서 미국에서도 ‘사이다 발언’으로 떠올랐다. ‘기생충’이 국제영화상 외에 주요 부문에서 수상한다면 봉 감독이 오스카를 로컬 시상식으로 규정한 발언을 철회해야 할지 모른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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