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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성태윤의 이코노믹스

내년은 가벼운 자만 살아남는 ‘존망지추’ 각오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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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20년 기업 생존의 조건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올해는 최저임금의 2년 연속 급격한 상승과 주당 최대 52시간 근로가 산업 전반에 확산하며 노동비용 상승 충격으로 경제가 휘청거린 한 해였다. 여기에 대외 여건마저 악화하며 한국경제는 눈에 띄는 경기하강을 보였다. 물론 경기란 것이 하강하면 다시 상승하는 순환 특성도 있기에 2020년 새해에 기대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미·중 패권 경쟁 달라질 것 없고 #경기순환 기대감 떠오르고 있지만 #소주성 정책이 경기상승 가로막아 #정책 궤도 수정해야 희망 보일 것

하지만 단순히 ‘경기는 순환하기 때문에 상승한다’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최저임금은 2020년 2.9%로 상승 폭이 제한됐지만, 이미 2년에 걸쳐 30% 가까이 오른 상태여서 상황이 어려운 업종과 지역에는 여전히 부담이다. 또 최대 근로 52시간제 역시 유예 대상을 확대하고 있지만, 미봉책에 불과해 상응하는 생산성이 확보될 때까지 산업에 부담이 된다. 근본적인 정책궤도 수정이 없다면 당분간 경기 반등을 얻기 어렵다는 뜻이다.

대외여건이 나아지면 도움이 된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대선에서 재선을 앞두고 있어서, 중국은 가파른 경기 하강에 대비해야 해서 지난 12일(현지시간) 미·중 통상협상에서 전격적으로 1단계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미·중 갈등은 근본적으로 패권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어 일부에 대한 합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모두 궁극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갈등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 ‘생존 원천’ 이익 급감

더구나 중국 경제가 갈수록 악화하는 것도 우리에게 부담이다.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우리는 시장 동조화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즉 국제투자자에게 중국경제의 악화는 한국의 실물경기와 금융시장 불안을 의미한다. 최근 중국의 10월 산업생산 증가는 지난해 동월 대비 4.7%로 9월보다 1%포인트 하락하고 소매판매 지표와 함께 시장 예상을 밑돌았다. 이미 해외 민간기관들은 2020년 중국의 성장률이 추가 하락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중국 정부에서 각종 경기부양책을 쏟아내는 것도 경기악화와 관련이 높다.

그런데도 우리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고용을 증가시킨다면 경기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경기순환이론에서 상승-둔화-하강-회복의 각 단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이 기업의 투자의사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강’에서 ‘회복’으로 전환될 때 중요한 조건이 투자수요가 발생하는 가운데 기업이 축적된 이익을 기초로 투자 여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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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런 상황과 거리가 있다. 특히 제조업 중심으로 생산을 오히려 줄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생산이 증가하면서 기존설비가 부족해야 투자수요가 발생하는데, 현재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전력 총사용량이 2019년 6월 -1%로 감소한 후 9월 -0.2%까지 전년 동기 대비 줄어드는 추세다. 특히 제조업의 전력사용량 감소가 눈에 띄는데 2019년 4월 -1.1% 이후 9월에는 -3.2%까지 감소했다.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직후를 제외하면, 최근처럼 전력 총사용량 또는 제조업 부문 사용량이 3개월 이상 계속 감소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중국에서 통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때 실질적인 경기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국제투자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다. 중국에서 경제를 담당해 온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이름을 딴 ‘리커창 지수(전력소비량·철도 물동량·은행 신규대출)’인데, 핵심이 전력소비다. 산업단지의 기계가 멈추고 공장의 불이 꺼질 때 전기사용은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돌파구로는 신규 사업으로의 재편을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의 자원재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같이 경직적인 노동시장 구조에서 신산업으로 인력을 재배치하는 것은 기업에 노사갈등 위험이 된다. 따라서 현재는 사업재편보다 기업 여건 악화로 폐업하거나 생산을 축소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기업의 성과 악화다. 최근 기업을 위협하는 가장 큰 현실적인 공포는 생존의 원천인 영업이익이 급감하거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 역시 생존에 대비해야

통계청의 2018년 기준 기업활동조사 잠정결과에 따르면 국내기업의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은 전년 대비 6.4% 감소했다. 2019년은 더욱 악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12월 결산 상장법인의 2019년 1~9월 매출은 1487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29% 증가에 그쳤다. 영업이익은 82조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감소(-39%)했고 당기순이익은 54조원으로 -45% 급감했다. 매출은 그대로인데 비용 급증으로 상황이 악화한 것이다. 특수가 사라진 반도체 업종을 제외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더욱이 지금은 물가하락이 경기를 악화시키는 디플레이션에 근접한 상황이다. 이미 GDP 디플레이터, 소비자 물가지수, 생산자 물가지수 등 여러 지표가 디플레이션 위험을 나타내고 있다. 가격이 하락하거나 매출이 늘지 않을 때 경제 주체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구매하거나 투자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디플레이션과 결합한 경기 부진 속에서 기업이 투자하거나 고용을 창출하기는 어렵고, 결국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고 매출이 늘지 않는데 비용까지 증가하는 여건에서 기업은 생존 자체가 핵심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즉 미리 투자하지 않아 잃어버릴 수 있는 ‘업사이드 퍼텐셜(upside potential)’보다 서둘러 투자한 후 위험에 노출되는 ‘다운사이드 리스크(downside risk)’를 주의해야 하는 환경이다. 더구나 부채로 원리금 상환 부담에도 노출되는 소비나 투자라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시기에는 기업이나 개인 모두 재무적으로 보다 가벼운 상태로 미래를 기다리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생존의 요체가 된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존망지추(存亡之秋), 2020년이 오고 있다.

남의 일 아닌 홍콩 디플레이션의 교훈

알고 보면 디플레이션은 1929년 미국 대공황과 1990년대 초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전부가 아니다. 제1·2차 대전 전간기(戰間期) 영국도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미국은 19세기부터 거듭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일본을 제외하면 대부분 오래된 일이라 이를 현대적 현상으로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 경우가 있는데, 1997년 아시아 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의 홍콩이다.

디플레이션의 원인으로는 ▶공급 증가와 ▶수요 위축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본토와의 경제통합 가속화로 저렴한 물건이 홍콩으로 유입된 공급 효과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주장도 있고, 아시아 위기로 전반적 수요가 위축된 결과라는 수요측면 입장도 있다.

강조점에 따라 관점이 다르지만, 경제 전문가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측면이 있다. 홍콩은 무역·금융거래의 안정성을 위해 홍콩달러를 미국달러에 일정 환율로 고정했는데, 이러한 페깅(pegging) 시스템이 디플레이션이 번질 때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경제 여건상 홍콩 달러의 가치가 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그 압력을 덜 수 있는 방법이 물건가격의 하락이라는 것이다.

홍콩당국은 환율 유지에 초점을 두었지만, 우리는 이자율 조정을 중심에 두고 통화정책을 수행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자율이 실제 경제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때 우리도 같은 일을 경험할 수 있다. 결국 물가상승률을 통화 당국이 목표하는 안정적 수준에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자율이 실제 경제 상황과 괴리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목표보다 낮은 물가상승률 하에서는 매출과 자산가치가 줄기 때문에 실질부채부담이 증가하고, 그 결과 파산과 고용·임금 축소가 발생해 수요를 위축시키는 ‘디플레이션 악순환 고리’로 이어져 경기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