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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어른들의 젠트리피케이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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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문현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아홉 살쯤이었나 한창 재잘재잘 말하길 좋아하던 때였다. 그날도 학교에 가자마자 담임선생님에게 딱 붙어 “선생님! 어제는요~ 제가요~” 하며 별 주제 없이 신이 났다. 어린아이들은 애석하게도 ‘우리 선생님’이면 좋아하고 보는 경향이 있건만, ‘우리 선생님’은 나를 뚝 자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 침 튀었어.”

그때 그 선생님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됐어도 최초의 ‘배제당함’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학교는 더는 어린이인 내가 주인인 공간이 아니었다. 교실은 어른인 교사 한 사람의 기준에 어린이 마흔 명이 눈치껏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곳이 됐다. 흥분하지 않고 조용하게 말하는 ‘어른의 문법’을 익히지 못한 나는 열등하고 미숙하기에 저 멀리 밀려난 느낌이었다.

‘겨울왕국2’를 상영하며 아이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노키즈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무 때나 “렛잇고” 노래 부르고 앞 좌석 차는 일부 어린이들과 영화 보기 싫다는 일부 관람객들의 짜증도 이해는 간다. 그렇지만 그런 목소리엔 어딘가 그 선생님의 목소리가 겹쳐 있다. “아, 시끄러워.” “아, 애들 짜증 나.”

만화영화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움직이는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즐기고 상상하고 뛰놀고 꿈꾼다. 이곳에 어른들이 들어오려 아이들을 밀어낸다면 그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영화는 이렇게 봐야 하는 것’ ‘아이들은 시끄럽고 불편한 존재’ 등 어른의 문법으로 아이들의 공간을 지배해도 되는 걸까. 지나친 불편함이 야기될 경우에만 비행기 승무원이 그러하듯 영화관 직원이 제지에 나서는 등 다른 해결책을 찾아보기가 귀찮은 건 아닐까. 손님이 왕도 아니고 부모가 죄인도 아닌 그 어딘가쯤에 모두가 머물 순 없는 것일까.

아이들의 소음까지 사랑하는 성인(聖人)이 될 순 없다. 다만 ‘우리가 아이들을 이해할 것인가,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중엔 전자를 택하는 게 성인(成人)의 자세가 아닐까. 그래도 짜증이 치밀면 이런 노래를 불러보자. ‘어떻게 소음까지 사랑하겠어. 아이들을 사랑하는 거지.’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