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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감량하고 천재 카레이서 변신한 '배트맨' 크리스찬 베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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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자동차 경기장 사진이 아니라 영화 '포드 V 페라리' 한 장면이다. 가운데 우승컵을 치켜든 사내가 주인공인1960년대 레이서 켄 마일스다. 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실존 인물과 싱크로율 높은 열연을 펼쳤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실제 자동차 경기장 사진이 아니라 영화 '포드 V 페라리' 한 장면이다. 가운데 우승컵을 치켜든 사내가 주인공인1960년대 레이서 켄 마일스다. 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실존 인물과 싱크로율 높은 열연을 펼쳤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자동차 경주를 담은 영화가 짜릿할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날카로운 여운은 예상 못 했다. 4일 개봉한 영화 ‘포드 V 페라리’는 미국 차 ‘포드’와 이탈리아 ‘페라리’가 1966년 세계 3대 자동차 대회 프랑스 ‘르망 24시’에서 격돌한 실화가 토대다.

4일 개봉 영화 '포드 V 페라리' 주역 #美포드사 레이싱 도전 이끈 숨은 천재 #"실제 오토바이광, 속도 안 보고 달리죠" #'더 파이터' '바이스' 실존인물 연기 극찬 #

르망 24시는 레이서 3명이 시속 370㎞의 불꽃 튀는 경주를 24시간 펼치는 지옥의 경기. 영화는 당시 출전이 처음이던 포드가 이 대회를 6연속 제패한 페라리를 꺾으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기를, 요동치는 엔진음이 심장에 와 꽂히듯 몰입 넘치게 그려냈다. 2시간 반 넘는 상영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단 관람평이 잇따른다.

배우 맷 데이먼(왼쪽)이 켄 마일스(오른쪽)를 포드사 레이싱팀에 이끄는 자동차 엔지니어아지 전직 레이서 캐롤 셸비 역을 맡았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배우 맷 데이먼(왼쪽)이 켄 마일스(오른쪽)를 포드사 레이싱팀에 이끄는 자동차 엔지니어아지 전직 레이서 캐롤 셸비 역을 맡았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여기에 기계식 대량생산체계 ‘포디즘’을 개발한 포드사가 대기업의 잣대에 맞춰 어떻게 개인을 말살시켰는지 씁쓸한 비판을 보탰다. 전작 ‘로건’(2017)에서 늙어버린 초능력자의 최후 전투를 처절한 서부극처럼 그려 히어로물의 새 지평을 연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배트맨' 배우의 놀라운 변신

특히 배우들의 호흡이 절묘하다. 역대 르망 24시 유일한 미국인 우승자 캐롤 셸비 역 맷 데이먼도 노련하지만, 크리스찬 베일(45)의 변신은 그저 놀랍다. 그가 맡은 켄 마일스는 포드사의 전설적인 레이서. 평소 자동차정비로 생계를 이으며 포드사의 대기업식 갑질에 정면으로 맞선 이 완벽주의 레이서의 깡마르고 그을린 얼굴, 까칠한 영국식 억양을 보노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그 배우가 맞나 싶다.

크리스찬 베일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3부작이다. 사진은 2편 '다크 나이트 라이즈'. 그는 도시의 수호자 배트맨으로 살아가는 명문가 출신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을 연기했다. [사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크리스찬 베일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3부작이다. 사진은 2편 '다크 나이트 라이즈'. 그는 도시의 수호자 배트맨으로 살아가는 명문가 출신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을 연기했다. [사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이코패스 살인마(‘아메리칸 사이코’)부터 성경 속 모세(‘엑소더스: 신들과 왕들’)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정교한 연기를 보여줘 ‘연기머신’ ‘베일 신’이라 불려온 그다. 특히 실존 인물 연기에 있어선 장인급이다.

실존 인물 연기가 오히려 자유롭죠

생애 첫 아카데미상(남우조연상)을 받은 영화가 약물중독 권투선수로 분한 실화극 ‘더 파이터’(2010). 이를 비롯해 50편에 달하는 출연작 중 아카데미 등 시상식 단골 후보가 된 작품 대부분이 실존 인물을 연기한 것이었다. ‘아메리칸 허슬’(2013)의 희대의 사기꾼, ‘빅쇼트’(2015)의 월스트리트를 물 먹인 괴짜 천재 등이다. 전 미국 부통령 딕 체니의 50년에 걸친 세월을 연기한 ‘바이스’로 올해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위 사진과 동일인물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영화 '바이스'에서 전 미국 부통령 딕 체니 역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 20kg 가까이 증량하고 삭발,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익힌 다음 매촬영 5시간 넘는 특수분장을 거쳐 캐릭터를 완성했다. [사진 콘텐츠판다]

위 사진과 동일인물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영화 '바이스'에서 전 미국 부통령 딕 체니 역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 20kg 가까이 증량하고 삭발,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익힌 다음 매촬영 5시간 넘는 특수분장을 거쳐 캐릭터를 완성했다. [사진 콘텐츠판다]

“실존 인물 연기가 주눅 든다는 사람도 있지만 전 반대에요. 실존 인물의 특징이나 버릇 같은 게 있어서 오히려 편합니다.” 이번 영화로 영화사와 사전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그런 특징을 자기가 그냥 만들어내면 주목받으려고 애쓰는 오만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죠. 그런데 실존 인물은 그 사람이 실제로 한 행동이나 태도니까 감독한테 제안도 하고 대담하게 연기할 수 있어요. 더 자유로운 것 같아요.”

미국 부통령에서 야생마 같은 레이서로

아무리 그래도 백악관에 군림한 우람한 권력자(‘바이스’)로 살다 단 7개월 만에 트랙 위의 야생마 같은 레이서(‘포드 V 페라리)로 변신하다니, 거의 둔갑술로 느껴질 정도다. 앞서 서부극 ‘3:10 투 유마’(2007)에서 함께했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다시 크리스찬 베일을 택한 건, 무엇보다 둘의 영혼이 닮았음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켄 마일스와 크리스찬 베일은 여러 모로 성격이 비슷하다. 베일은 놀라운 재능의 배우지만, 스타라는 지위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는 전했다.

영화 '포드 V 페라리' 한 장면. 입꼬리를 내려 입술을 앙다물고 턱을 내밀곤 하는 동작까지, 실존 인물에 가깝게 연기했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영화 '포드 V 페라리' 한 장면. 입꼬리를 내려 입술을 앙다물고 턱을 내밀곤 하는 동작까지, 실존 인물에 가깝게 연기했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켄 마일스는 영국 출신 레이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조종사로 참전한 후 자동차 경주에 몸담으며 미국으로 이주했다. 가족에게 헌신했지만, 속도에 있어선 한계를 몰랐다. 크리스찬 베일은 “저들은 왜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전할까,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 경주 트랙을 달려본 적 없는 관객들도 레이서들이 느끼는 스릴, 살아있다는 원초적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했다.

저도 오토바이 탈 때 하늘 나는 듯

그 자신도 속도광으로 알려진 베일은 1960년대 자동차 경주를 이렇게 돌이켰다. “당시 레이서들은 뮬산 스트레이트(르망 서킷의 유명한 직선 구간)를 시속 약 370㎞로 달렸습니다. 저도 오토바이 탈 때 속도를 잘 안 봐요. 알고 싶지 않서 테이프로 가려놓거든요. 언젠가 확인하니 시속 246㎞더라고요. 정말 하늘을 나는 것처럼 달렸거든요. 그런데 370㎞라니? 60년대에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할지도 확실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런 도전을 하는 사람에겐 흥미가 생기죠.”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자동차의 섹시함, 경주의 위험을 사실적이면서도 불편한 현실까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컴퓨터그래픽(CG)을 최소화했다. 차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한계를 밀어붙이는 느낌을 위해 배우들이 최대한 많이 운전해보도록 했단다. 이를 위해 베일은 촬영 전 수개월간 자동차 경주 전문인 밥 본듀런트 하이 퍼포먼스 운전 학교에서 훈련 받았는데 이 학교의 설립자가 바로 켄 마일스의 친구였다. 극 중 켄 마일스가 타는 셸비 코브라 및 여러 버전 포드 GT40 주행을 모두 몸에 익혔다.

레이싱 도중 차 문 안 닫혀 '아찔'

크리스찬 베일과 맷 데이먼은 이번 영화로 처음 호흡을 맞췄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크리스찬 베일과 맷 데이먼은 이번 영화로 처음 호흡을 맞췄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차체 안팎에 부착한 카메라엔 레이서들이 얼마나 얇고 가벼운 알루미늄의 덩어리에 목숨을 맡기고 있는 것인지가 생생히 담겼다. 이런 속도로 달리다가 완전히 산산분해 돼서 운전자가 나뒹굴어도 이상할 게 없겠다는 인상마저 준다. 경기 도중 켄 마일스가 운전석 문이 닫히지 않아 한손으로 닫으면서 트랙을 도는 장면은 소름이 다 돋는다.
1961년 페라리의 르망 24시 수상자인 4500만달러 가치 자동차를 비롯해 실제 당시 유명 클래식카를 박물관 등에서 공수한 경주장면도 볼거리다. ‘분노의 질주’ ‘퍼스트맨’ ‘캡틴마블’ 등에 참여한 자동차 코디네이터가 미술팀과 머리를 맞대 총 34대 경주용 자동차를 추가로 특수제작했다.

'육체의 연금술사' 또 30㎏ 감량

크리스찬 베일이 역대 가장 낮은 55kg까지 감량한 영화 '머시니스트'. 등뼈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사진 KBS프리미어영화제]

크리스찬 베일이 역대 가장 낮은 55kg까지 감량한 영화 '머시니스트'. 등뼈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사진 KBS프리미어영화제]

배역에 맞춰 20~30㎏쯤은 거뜬히 찌웠다 빼길 반복해 ‘육체의 연금술사’란 별명을 얻은 베일이다. 이번엔 전작에서 두둑하게 불린 몸집을 30㎏ 넘게 뺐다. 불면증으로 날로 야위어가는 기계공 역할로 시체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머시니스트’(2004)에선 키 185㎝에 몸무게를 55㎏까지 낮춰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였다. 당시 아내가 걱정돼 잠잘 때 숨은 쉬는 지 코에 손을 대본 적도 있단다.
이번 영화 상대역 맷 데이먼이 체중조절 비결을 묻자 그는 단순히 “먹지 않았다”고 답했다. ‘배트맨’ 3부작에서 90㎏ 가까운 근육질로 출연한 사이사이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레스큐 던’의 베트남전 포로(61㎏), ‘더 파이터’의 볼이 핼쑥한 마약중독자(66㎏) 등 감량한 데 더해 ‘바이스’ ‘아메리칸 허슬’에선 배나온 민머리 외모를 위해 20㎏씩 증량까지 한 그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과 다시 만난 영화 '아메리칸 허슬'에서 크리스찬 베일은 희대의 범죄소탕 작전에 투입된 실존 사기꾼 어빙 로젠펠드를 연기해 급격한 증량에 나섰다. [사진 누리픽쳐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과 다시 만난 영화 '아메리칸 허슬'에서 크리스찬 베일은 희대의 범죄소탕 작전에 투입된 실존 사기꾼 어빙 로젠펠드를 연기해 급격한 증량에 나섰다. [사진 누리픽쳐스]

“크리스찬 베일은 준비를 너무 완벽하게 해서 마치 모든 것을 쉽게 소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이스’ ‘빅쇼트’의 동료 배우 스티브 카렐이 영화사에 전한 얘기다. ‘포드 V 페라리’에 출연한 1번 이유가 크리스찬 베일이었다는 맷 데이먼은 일간지 ‘LA타임즈’와 인터뷰에서 “촬영장에서 베일은 수천 시간씩 준비하며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여, 완벽히 구축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건 정말 끝내준다”고 했다.

열세 살에 스필버그 영화 발탁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태양의 제국'(!987) 주연을 맡았던 아역 시절 크리스찬 베일. 당시 13세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태양의 제국'(!987) 주연을 맡았던 아역 시절 크리스찬 베일. 당시 13세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크리스찬 베일은 아역으로 출발했다. 영국 출신으로 웨일즈에서 태어나 가난 탓에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자라다 배우 일을 하며 미국에 정착했다. 열두 살에 TV 영화 ‘아나스타샤’(1986)로 데뷔해 이듬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태평양전쟁을 소년의 시선으로 다룬 ‘태양의 제국’에서 4000대 1 경쟁을 뚫고 주연에 발탁되며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연기경력이 30년이 넘는다. 정작 자신은 배우란 직업과 여전히 애증의 관계다. 최근 일간지 ‘토론토 선’과 인터뷰에선 이런 속내를 밝혔다.

“내게 꿈이 하나 있다면 오토바이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다. 아직 못했지만, 언젠가 한다. 운 좋게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지만, 우리가족은 힘든 시간을 겪었고 친구네 소파에서 잔 적도 있다. 내게 연기는 생업이자, 우리 가족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다. 그러나 고백컨대 결코 내 꿈은 아니었다.”  

"연기는 가난 극복한 생업, 꿈 아니었죠"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영화 '파이터'에선 복싱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형제의 실화를 연기했다. 크리스찬 베일은 백업 선수 출신의 전설적인 복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의 문제 많은 형 디키 에클런드를 연기했다. [사진 데이지엔터테인먼트]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영화 '파이터'에선 복싱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형제의 실화를 연기했다. 크리스찬 베일은 백업 선수 출신의 전설적인 복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의 문제 많은 형 디키 에클런드를 연기했다. [사진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지금도 매 작품 촬영 전 잘해내지 못할까봐 불안에 시달린다는 그다. 불안은 그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 작품 만반의 준비를 통해 완벽에 다가서게 했다. 그가 마술사로 분한 ‘프레스티지’와 ‘배트맨’ 시리즈를 함께한 크리스토퍼 놀란부터 은행강도 실화극 ‘퍼블릭 에너미’에 이어 이번 영화 기획에 참여한 마이클 만, ‘뉴 월드’ ‘나이트 오브 컵스’의 테렌스 말릭, ‘더 파이터’ ‘아메리칸 허슬’의 데이비드 O 러셀 등 한번 찾은 감독들이 다시 그를 찾은 이유다.
흥행성이 부족하단 이유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맷 데이먼 등 다른 배우에게 캐스팅에서 밀린 시절도 옛말이다. ‘배트맨’ 시리즈로 톱스타로 자리 잡은 후엔 딱 맞는 배역을 꿰차며 연기상의 단골 후보가 돼왔다. “레이싱 업계 거물들에게 고용되는 건 항상 어리고 잘생긴 드라이버들이에요. 켄 마일스는 해당사항이 없죠. 그래도 계속 갈 길을 갑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이번 영화에 대해 그는 말했다. 크리스찬 베일의 질주도 계속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모세스 역할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이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모세스 역할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이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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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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