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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가판대 앞으로 매일 달려갔던 그때 그 시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강명주의 비긴어게인(19)

“앗,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책상 앞 시계가 오후 5시 30분을 가리킨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에 걸쳐있는 코트를 집어들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보통 오후 5시에 사무실에서 출발하는데 오늘은 일이 많아 그만 시간이 좀 늦어졌다. 광화문으로 가는 길이다. 벌써 날은 저물고 있다. 11월이다. 신문로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 쌀쌀한 바람까지 불고 있다.

저녁 햇살을 뒤로하고 광화문으로 뛰어간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 잎이 시야에 들어온다. 황금빛 노란색으로 길바닥을 수놓고 있다.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의 낭만도 느낄 겨를도 없이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그 길을 뛰어가고 있다. 오늘따라 땅바닥의 낙엽이 오히려 밉기만 하다. 마음은 급한데 왜 이리 낙엽이 미끄러운가.

모아진 신문들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한다. 일간지는 경제면, 경제신문은 금융면으로 손놀림이 번개처럼 움직인다. 신문에 실린 기사내용별로 그날 저녁일이 결정되고 있었다. [일러스트 강경남]

모아진 신문들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한다. 일간지는 경제면, 경제신문은 금융면으로 손놀림이 번개처럼 움직인다. 신문에 실린 기사내용별로 그날 저녁일이 결정되고 있었다. [일러스트 강경남]

뛰는 내내 걱정이 태산이다. “오늘은 또 어떻게 나오려나.”오전에 보도자료를 냈다. 은행 수신상품에 대한 내용이다. 최초로 시도하는 외국계 은행의 소비자금융사업이라 관심이 많지만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왜 다른 시중 은행들과 다르게 시도하느냐, 금리는 시중은행보다 왜 그리 높은 거냐, 외국계 은행이라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냐….

매일 저녁 달려간 신문사 뒷골목

광화문 사거리까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느새 나의 시선은 맞은편 신문사 뒷골목 앞으로 향하고 있다. 오토바이들과 사람들이 모여있다. ‘아이쿠, 벌써 나왔구나!’ 조간신문 가판이 모이는 곳이다. 그곳을 향해 광화문 지하 계단을 두 개씩 점프해 뛰어 내려간다. 지하도 통로를 지나 신문사가 있는 지하도 출구 계단을 또 두 개씩 점프해서 올라간다. 이미 올라왔을 때는 숨이 코에 닿아 있다. 그래도 아랑곳 가판대로 달려가 능숙한 솜씨로 나와 있는 모든 조간신문과 경제신문 가판을 손에 넣는다.

모아진 신문들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한다. 일간지는 경제면, 경제신문은 금융면으로 손놀림이 번개처럼 움직인다. 6백만불 사나이의 눈처럼 스캔하기 시작한다.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별로 그날 저녁 일이 결정되고 있었다. 가까운 공중전화부스로 신문을 가지고 이동한다. 벌써 많은 사람이 전화를 하고 있다. 다행히 빈 전화부스가 있다. 수첩을 뒤적이며 해당 언론사 기자들과 연결을 시도한다. 오늘도 나는 몇 군데 신문사를 돌아야 한다. ‘편집국 데스크에서 또 밤새야 하나’ 하면서 내 발길은 가까운 신문사로 이미 향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같이 출근한다. 어제 저녁에 봤던 가판신문들도 함께. 은행 건물 안내데스크에 배달된 조간신문들을 한 아름 안고 사무실로 들어온다. 모든 신문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기 시작한다. 가판과 다소 달라진 신문들이다. 어젯밤 해당 신문사 편집데스크와 밤늦게까지 작은 전쟁을 치렀다. 편집오기 수정도 확인하고 문구도 확인했다. 다른 내용들은 조목조목 열성을 다해 설명도 했다. 물론 기사에 담아주지 않은 신문사도 있긴 하지만. 다시 한번 모든 기사 내용을 확인한다. 다소 아쉬운 점은 있으나 최선을 다했기에 해당 기사들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오려낸다.

어쩌다 길에서 보이는 공중전화부스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시절에는 전화부스에서 수첩을 뒤적이며 언론사 기자들에게 연락을 했다. [사진 pixabay]

어쩌다 길에서 보이는 공중전화부스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시절에는 전화부스에서 수첩을 뒤적이며 언론사 기자들에게 연락을 했다. [사진 pixabay]

미디어 스크랩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산휴휴가 중이다. 인턴직원이 도와주고 있지만 모든 일은 내가 하고 있다. 참고용으로 가판 신문도 미디어 스크랩을 해놓는다. 간단한 요약본을 만들어 마케팅총괄본부장께 보고한다. “어젯밤 고생 많았죠? 편집국에서 연락도 받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왜 나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일까?’ 은행 감사, 은행업무 총괄, 대고객서비스일만 해온 나에게 홍보업무가 주어졌다. 홍보에 홍자도 모르는 홍보 문외안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그동안 마케팅총괄본부장에게 잘못 보인 보복성 인사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게다가 곧 산휴휴가들어가는 과장을 함께 일하도록 배정했기에 더욱이 그러했다. 은행을 그만 다녀야 하나 고민했다.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만둘 수 없었다. 그동안 은행에서 쌓아온 능력을 물거품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되잡아본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홍보부장으로 임명되자 나는 곧바로 광화문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서점으로 달려갔다. 홍보 관련된 서적 5권을 구입했다. 한 달 동안 밤샘을 해가며 미친 듯이 공부했다. 로터스 123을 사용해 스프레드시트 1장에 깨알 같은 글자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홍보 전략과 계획안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가판이 사라지고 인터넷 신문, 모바일 신문이 온라인 리얼타임으로 세상의 눈이 되고 있다. 전에는 공중전화가 연락수단이지만 지금은 각자 휴대폰을 통해 서로가 연결이 되고 있다. [일러스트 강경남]

지금은 가판이 사라지고 인터넷 신문, 모바일 신문이 온라인 리얼타임으로 세상의 눈이 되고 있다. 전에는 공중전화가 연락수단이지만 지금은 각자 휴대폰을 통해 서로가 연결이 되고 있다. [일러스트 강경남]

홍보는 현장이었다. 발품을 쉬지 않고 팔았다. 젊고 패기 있는 기자, 일간지, 경제지는 물론 시사주간지, 월간지뿐만 아니라, 럭셔리 잡지사, 그리고 방송사 기자도 만났다. 다양한 매체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밖의 사람과 세상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시야가 은행 안에서 세상 밖으로 넓어지는 순간이다. 은행 내부인맥 우물 안에서 벗어나 외부 인사와 새로운 인연을 맺어갔다. 그 덕에 나는 마케팅과 영업 전문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사반세기가 훌쩍 넘게 흘렀다. 지금은 가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인터넷 신문, 모바일 신문이 온라인 리얼타임으로 세상의 눈이 되고 있다. 전에는 공중전화가 연락수단이지만 지금은 각자 휴대폰을 통해 서로가 연결되고 있다. 어쩌다 길에서 보이는 공중전화부스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금융업계 임원들의 이야기이다. 그 어렵다는 은행고시에 합격한 신입행원이 막상 현업에 발령받아 일하게 되면 1년도 되지 않아 그만 두려 한다고 한다. 막상 현실에서 부닥치는 은행업무가 본인 생각보다 다르다는 이유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아마도 주어진 일이 본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나 보다. 은행재직 시절에도 원하는 부서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도중에 그만둔 행원도 있었다.

지난번 강의에서 어느 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어떻게 금융업계에 오래 다닐 수 있었나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새로운 분야에 용기 있는 도전과 책임감”이라고 이야기한다. 한번 도전하면 그 일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해내려 한다. 그 덕에 나는 남과 다른 나만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확보했다.

강의에서 어느 학생이 어떻게하면 금융업계에 오래 다닐수 있냐고 질문을 던졌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새로운 분야에 용기있는 도전과 책임감"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러스트 강경남]

강의에서 어느 학생이 어떻게하면 금융업계에 오래 다닐수 있냐고 질문을 던졌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새로운 분야에 용기있는 도전과 책임감"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러스트 강경남]

날 홍보맨으로 키운 그분  

퇴임 후 어느 날 그분을 만났다. 금융업계에서 한획을 그으신 분이다. 그분과 함께 일하면서 끊임없이 쏟아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탄복했었다. 하지만 그 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쏟아지는 홍보업무량에 탄식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늘 감사하는 마음이 앞선다. 30년 넘는 세월이지만 그분에게는 퇴직이 없다. 아직도 열정적으로 살아가신다. 이제야 그 이유를 질문해본다.

“왜 전혀 경험도 없는 저에게 그 일을 맡기셨어요?” “그 당시 PR 업계 내로라하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오랜만에 나온 광화문 거리, 예전처럼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 신문사 주변에는 은행나무가 있다. 올가을 유독 색깔이 영롱하다. 황금 물결이다. 그분의 사려 깊은 배려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다.

WAA인재개발원 대표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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