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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 허벅지 찔렀다, 그래도 졸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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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호 21면

24시간 잠 안 자고 책 읽는 ‘2019 울트라독서마라톤’에 참가한 김여진 인턴 기자. 독서에 대한 관심을 북돋기 위해 마련된 대회다. 전민규 기자

24시간 잠 안 자고 책 읽는 ‘2019 울트라독서마라톤’에 참가한 김여진 인턴 기자. 독서에 대한 관심을 북돋기 위해 마련된 대회다. 전민규 기자

책깨나 읽는다는 소리 들으며 자랐다. ‘문청(문학청년·작가 지망생)’은 아니었지만 새벽까지 소설책을 읽은 적도 꽤 된다. 하지만 24시간 잠 안 자는 ‘울트라독서마라톤’은 달랐다. 두 발로 뛰는 마라톤이 아니라 쏟아지는 잠, 달아나는 집중력과 싸움을 벌이는 정신의 마라톤이었다. 승자가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완주에 의미를 두는 두 발로 하는 마라톤처럼 완주, 아니 완독할 경우 자긍심이라는 선물이 주어지는 정신 승리의 게임이었다.

김여진 기자 독서마라톤 도전기 #24시간 잠 안 자고 책 읽기 #61명 참가, 27명 완주 극한 체험

영화 오래 보기 대회는 들어봤어도 독서 마라톤은 처음이었다. 해낼 수 있을까. 덜컥 신청했다. 독서마라톤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한다. 한국도서관협회 이용훈 사무총장이 제안해 2017년 전주에서 열린 대한민국독서대전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올해 들어 지난달 12·13일 대구 대회에 이어 지난 주말인 2·3일 서울 은평구 혁신파크에서 두 번째 행사가 열렸다. 갈수록 책을 멀리하는 사람들을 붙들기 위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개최하는 행사다.

2일 오전 11시. 참가자들이 모여들었다. 혁신파크 잔디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천막 아래 책상과 의자가 독서 장소였다.

룰은 단순했다. 그런 만큼 단호해 보였다. 가져온 혹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책을 24시간 동안 읽기만 하면 된다. 성실히 읽었는지는 평가 대상이 아니다. 단 책에서 시선이 3분 이상 벗어나거나 3분 이상 눈 감고 있으면 실격 처리된다.

기자는 재미와 의미를 고려해 네 권을 준비해 갔다. 86명의 참가 신청자 가운데 61명이 현장에 나타났다. 열 살짜리 쌍둥이 형제를 데리고 양평에서 올라온 주부 변경애(42)씨, 지난달 대구 대회를 놓친 게 안타까워 상경했다는 대학생 장지훈(21)씨가 끼어 있었다.

#2일 낮 12시 『대도시의 사랑법』

세 차례의 종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됐다. 50분 읽고 10분 쉬는 방식이다. 이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는 70분씩을 빼면 24시간 1440분 가운데 1050분을 꼬박 읽기만 해야 한다.

기자는 박상영 작가의 잘 읽히는 동성애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을 첫 책으로 선택했다. 대학생 장지훈씨는 반대 전략. 초반에 어려운 책, 이튿날 새벽에 사진이 많아 읽기 쉬운 책을 배치했다고 대회가 끝난 다음 털어놓았다.

참가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감시하는 심판들의 발소리만 들릴 뿐. 10, 20분 지났는가 싶었는데, 첫 50분 독서를 종료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벌써 끝났어?” 다들 의외라는 반응. 할만한데?

#오후 7시 『불평등의 세대』

7시간 만에 첫 탈락자가 나왔다. 아니, 자발적 탈락이다. 열 살짜리 딸 하음이와 함께 온 어머니 김혜진씨가 다음날 일정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기자의 두 번째 책은 서강대 이철승 교수가 386 기득권을 문제 삼은 『불평등의 세대』. 젊은 세대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이었는데도 역시 저녁을 먹고 난 식곤증이 문제였다. 메모라도 해서 떨치려 했지만 어려웠다. 고개가 아프고 무릎도 쑤셔왔다. 숫자와 그래프는 왜 그리 많은지. 독서 마라톤에 이런 책을 가져오는 게 아니었다는 자책감이 점점 강해졌다. 자정 직전 책장을 덮었다. 200쪽가량 읽었을 뿐이었다.

#밤 12시 『화이트 노이즈』

세 번째 꺼내 든 책은 미국의 현대문명 비판자 존 드릴로의 장편소설 『화이트 노이즈』. 역시 거창했나. 자정이 되자 컵라면 야식이 제공됐다. 먹지 않았더라면 한결 쉬웠을지 모른다. 책상에 다시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다른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인 모양. 새벽 3시, “라면을 먹고 난 뒤로 잠을 참지 못하겠다”며 짐을 싸는 사람이 있었다.

새벽 내내 기자는 사투를 벌였다. 펜으로 허벅지를 찔러보기까지 했다. 한순간 눈을 떠보니 심판이 기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탈락이구나.” 어느새 잠들었던 것. 하지만 기자가 정신을 추스르자 심판은 물러갔다. 탈락시키기보다 슬쩍 깨워 계속 읽게 하려던 것이었다.

8시간 걸려 드릴로 소설을 완독했다. 하지만 읽었다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깨어 있는 게 최우선 목표였던 탓이다.

#3일 오전 9시 『체호프 희곡선』

완주까지 3시간. 『체호프 희곡선』은 술술 읽혔다. 더는 졸리지 않았다. 주최 측이 준비한 완주 기념 메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다시 낮 12시. 27명이 메달을 받아들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곳곳에서 인사가 오간다. 기념사진도 찍는다. 한계를 경험했지만 결국 이겨내 뿌듯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밤늦게 퇴근해 아이까지 돌봐야 해서 평소 마음 편히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정은숙(44)씨는 “혼자서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고 했다. 장지훈씨는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다같이 책을 읽는다는 게 너무 좋았다”고 했다.

독서마라톤이 내년에도 열릴지는 미지수다. 예산이 잡혀 있지 않아서다. 진흥원 김상훈 주임은 “대구시 등 마라톤을 접해본 일부 지자체들이 개최에 관심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용훈 도서관협회 사무총장은 “오랜 시간 책을 읽는 데서 오는 인생의 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여진 인턴기자 kim.yeoji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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