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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때 직접 PPT 띄우고 열변···'4년의 난'이 신동빈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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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지난 달 30일 오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31층 오디토리엄 롯데그룹 정기 경영 간담회. 간담회가 끝난 뒤 롯데 계열사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깜짝 놀랐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임원 150여명의 손에 A4 용지 2장 분량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편지 말미의 발신자는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하지만 실제로 보낸 사람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라는 사실은 롯데 임원이면 다 안다. 종이 두 장의 무게는 상당했다. 이 CEO는 “경영 간담회에서 이런 편지를 받아본 게 처음이어서 매우 긴장됐다”고 말했다.

5대그룹 리더십 대변신 ④신동빈

언어는 비장했다. ‘위기’ ‘변화’ ‘기회’ ‘생존’. 이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왔다. 편지의 주요 메시지는 ‘그동안 모두 고생했지만, 이대로는 생존할 수 없다’였다. 이날 롯데는 비상경영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신 회장이 사장단회의에서 집요하게 질문하며 오류를 지적하는 풍경도 흔해졌다. 또 해외 기업 인수 입찰 때 직접 나서 발표를 하기도 한다. 열심히 듣지만 말수가 적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신 회장의 스타일을 고려할 때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무엇이 신 회장을 바뀌게 한 걸까.

‘4년의 난’, 신동빈을 바꿨다

“4년의 난(亂)이 신 회장을 담금질했다고 봅니다.” 재계 관계자는 신 회장의 변신을 이렇게 진단했다. ‘4년의 난’. 지난 4년은 신 회장에게 전쟁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신 회장의 형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의 경영권 분쟁(2015년)이 촉발한 검찰수사(2016년)는 시작에 불과했다. 신문 사회면과 정치면은 롯데 관련 기사로 채워졌다.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부지 제공으로 인한 중국에서의 보복(2017년)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롯데에 2조5000억원의 손실을 안겨주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신 회장이 법정 구속(2018년)되자 내부에선 “회사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지난 4년의 사건은 롯데그룹 50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롯데 내부 사정과 사회적 환경, 오너의 가정사가 얽혀 만들어낸, 사상 초유의 비상 상태였다. 그동안 롯데는 사회 전면에 나설 일이 드물었다. 뿌리가 유통인 기업의 특징이기도 했지만 창업자인 신격호 명예회장의 캐릭터가 그랬다. 신 명예회장은 언론 인터뷰는 물론 재계 모임에 참석한 것도 손에 꼽는다. 신동빈 회장도 ‘경청의 아이콘’이라고 불릴 정도다. 하지만 4년의 난을 통해 신 회장은 강하게 거듭났다.

지난달 17일 대법원이 신 회장의 국정농단사건 상고심에서 항소심(징역 2년6월·집행유예 4년) 판결을 확정하면서 고비를 넘겼다는 평가가 나왔다. 총수 부재 가능성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차였다. 하지만 판결 13일 만에 열린 경영회의, “20분 먼저 오라”는 지시에 참석한 자리에선 또 위기가 화두였다. 비상경영선포일은 마침 공모주 청약에서 대박을 낸 롯데위탁관리부동산투자회사(롯데리츠) 상장일이기도 했다. 롯데리츠는 롯데쇼핑이 보유한 상업용 부동산(백화점·마트·아웃렛 등 6곳)에 투자해 임대소득을 배당하는 사업을 한다. 상장으로 실탄 최소 1조원이 확보된 호재가 있던 날이다. 신 회장이 밀어붙여 6년 준비한 리츠 사업이 좋은 출발을 보인 날이었지만 축하할 여력은 없었다. 그룹을 지탱하는 양대 축인 유통·화학의 올해 영업이익 시장 전망치는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

대상무형(大象無形). 신 회장이 올 초 제시한 경영 화두다. 초 변화의 시대 생존을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다는 의미다. 신 회장이 바뀐 건 그의 행보에서 드러난다. 그는 쉬는 날도 현장을 찾는 일이 잦아졌고 현안 보고를 받는 빈도도 늘었다. 서울에 머무는 주말 새로 생긴 사업장을 방문하거나 공장에 예고 없이 들르는 식이다. 지난 1월부터 이어진 눈에 띄는 특징이다.

신동빈 회장이 1월 화두를 내며 함께 한 주문은 크게 넷이다. ▶5년 뒤, 10년 뒤 어떠한 사회가 될 것인지를 예측하라 ▶이를 위한 명확한 비전과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라 ▶고객ㆍ시장의 변화와 경쟁사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하라 ▶각 계열사 임원은 대표를 도와 이를 수립해 7월에 발표하라 등이다. 6개월 뒤 하반기 사장단 회의에서 ‘과제’를 해 온 각 계열사 대표의 희비는 엇갈렸다. 회의 마지막 날 ‘인터널 IR’이라는 부제로 진행된 행사에선 아예 과제에 대한 가상 투자를 진행했다. 58개사의 대표이사와 임원 150여 명이 각 사 대표의 전략을 듣고 투자를 진행해 점수를 매겼다. 신 회장이 이 자리에서 “위기 속에서 힘을 발휘할 때 기회가 온다”며 보수적인 전략을 질타했다.

 지난 1월 12일인천 관교동 롯데마트 인천터미널점을 둘러보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롯데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 회장은 일정을 알리지 않은 현장 방문을 늘려가고 있다. [사진 롯데지주]

지난 1월 12일인천 관교동 롯데마트 인천터미널점을 둘러보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롯데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 회장은 일정을 알리지 않은 현장 방문을 늘려가고 있다. [사진 롯데지주]

롯데 계열사의 한 관계자는 “몇몇 CEO는 그냥 넘어갈 만한 사안에 대해서도 너무나 집요한 질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신 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고 투옥되는 와중에 중국 사업 실패와 이커머스의 세력 확장 등 유통산업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사건이 불거지면서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이로 인해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한 신 회장이 이른바 '오너 리스크'를 벗어난 이후 그룹을 다잡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히타치 케미칼 입찰, 직접 PPT 띄운 신동빈

지난 9월 도쿄에서 진행된 히타치 케미칼 본 입찰을 위한 롯데케미컬의 설명 현장은 술렁였다. 신 회장이 직접 나서 “왜 롯데케미칼이 히타치를 인수해야하는지”에 대한 열번을 토했다. 그룹사 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대부분 황각규 부회장 등에게 맡기고 뒤에서 듣는 걸 즐기는 그에겐 파격적인 행보다.

히타치케미칼은 롯데 화학부문에서 빠진 사업 부분의 조각, 즉 전자재료사업 부문 고부가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 중의 하나인 음극재와 반도체칩을 외부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덮은 에폭시몰딩컴파운드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30~40%)을 자랑한다. 8조원 규모의 거래에 투입할 수 있는 역량은 모두 쏟아부었다. 신 회장이 그룹 총수에 오른 뒤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롯데그룹 투자 규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롯데그룹 투자 규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롯데그룹 관계자는 “얼마나 애착을 갖고 진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롯데케미칼 신규사업팀은 거의 매일 미국과 유럽 화학사 관련 검토 보고서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의 불확실성 등 대외 여건이 좋지 않아 히타치 입찰은 불발됐지만, 당분간 롯데의 핵심 투자가 주요 화학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호를 주기엔 충분했다.

화학 스페셜티가 살길, 2016년 놓친 액시올 “아까운 사업”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1990년 한국 롯데 근무를 시작한 신 회장의 첫 근무지다. 현재 롯데그룹의 수뇌부는 ‘호남석유화학 라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신 회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인사가 황각규 지주 부회장이다. 황 부회장은 한국 생활이 낯설었던 신 회장이 가장 의지한 동료였다. 김교현 화학 BU장도 당시 근무 멤버 중 하나다. 이들이 주도하는 화학 스페셜티 사업 인수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신 회장을 비롯해 롯데 화학 BU 관계자들은 2016년 막바지 계약 단계였던 미국 액시올(현 웨스트레이크) 인수를 놓친 것을 아직도 아까워한다. 합작 회사도 운영하고 있어 롯데는 인수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검찰 수사와 이어지는 재판에 마지막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포기했다. 2여년이 지난 현재 당시 3조3000억원의 액시올의 기업 가치는 두 배 이상 뛰었다.

 5월 9일(현지시간) 미국 루이지애나 레이크찰스에서 롯데케미칼 에틸렌 공장 준공식. (왼쪽부터) 존 벨 에드워즈 루이지애나 주지사, 이낙연 국무총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해리 해리슨 주한미국대사, 실비아 메이데이비스 백악관 정책 조정관 부차관보, 웨스트레이크 알버트 차오 사장 [사진 롯데지주]

5월 9일(현지시간) 미국 루이지애나 레이크찰스에서 롯데케미칼 에틸렌 공장 준공식. (왼쪽부터) 존 벨 에드워즈 루이지애나 주지사, 이낙연 국무총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해리 해리슨 주한미국대사, 실비아 메이데이비스 백악관 정책 조정관 부차관보, 웨스트레이크 알버트 차오 사장 [사진 롯데지주]

롯데는 일찌감치 미국 직접 투자에 눈을 돌렸다. 롯데는 지난 5월 미국 루이지애나주 레이크찰스에 셰일가스 기반의 에틸렌 생산설비인 ECC(Ethan Cracking Center) 준공식을 열었다. 총 사업비 31억 달러(3조6000억원)를 투자해 에틸렌 100만t, 에틸렌글리콜 70만t의 생산능력을 보유한 석유화학단지를 건설·운영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현 상황에서는 성공으로 보이지만, 2012년 투자 검토를 할 때만 해도 무모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롯데그룹 주요 해외 투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롯데그룹 주요 해외 투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롯데는 2012년 셰일가스 TFT를 구성해 북미 셰일가스 기반 사업 검토를 시작해, 2015년 말 투자를 결정하고 2016년 6월 기공식을 열었다. 이 기간 유가가 떨어지자 셰일가스를 원료로 한 화학단지의 채산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했다. 세계 주요 화학사가 유가 하락을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동안 롯데는 예정대로 투자를 진행했다. 셰일 가스 추출 단가가 떨어지면서 평가는 달라졌다. 이미 영업이익률 30%를 내고 있다. 7년 전 투자 검토를 한 덕에 맛볼 수 있는 성공이다. 조용하지만 저돌적인 신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롯데그룹 주요 국내 투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롯데그룹 주요 국내 투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롯데그룹은 면세점·마트·호텔 등 다른 분야에서도 국내 대형 서비스기업 중에서 가장 해외지향적인 유통기업”이라며 “유통과 다소 이질적인 중화학 산업 비중을 높이면서 신 회장이 포트폴리오 분산 효과를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유통과 화학으로 롯데그룹 사업의 양대 축을 세워놓고, 향후 경기가 불투명해지면 한쪽의 손실을 다른 쪽이 만회하는 구조를 갖추겠다는 경영 전략을 최근 의사결정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12년 이후 롯데그룹 주요 인수합병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롯데지주]

2012년 이후 롯데그룹 주요 인수합병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롯데지주]

지주사체제 마지막 퍼즐은 호텔롯데 상장

2017년 10월, 롯데그룹의 지주회사인 롯데지주가 출범했다. 롯데제과·롯데쇼핑·롯데푸드·롯데칠성음료 4개 상장사의 투자 부문을 합병해 설립됐다. 2014년 6월 기준 순환출자가 75만개에 달했던 불투명한 지배구조 개선 약속의 첫걸음이었다. 현재 롯데그룹 내 모든 순환 출자는 해소됐다. 롯데 경영권 분쟁이 발단되었지만, 결국 경영 투명성을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 2006년 롯데쇼핑 상장 당시 수뇌부가 “현금이 많은 회사를 왜 남에게 주느냐”고 할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문화를 바꾸기 위한 움직임도 이젠 대세다. 2018년 7월 롯데정보통신이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했다. 롯데쇼핑 상장 뒤 무려 12년만의 롯데 계열사 상장이다.

롯데지주 체제는 올해 중요한 고비를 넘었다. 공정거래법상 지주사는 금융업 또는 보험업을 영위하는 국내회사 주식을 소유할 수 없어 예정된 금융 관련계열사(롯데카드ㆍ롯데캐피탈ㆍ롯데손해보험)의 처분과 매각은 지난달 마무리됐다. 마지막 퍼즐은 호텔롯데 상장이다. 이를 롯데지주와 합병해 완전한 지주사 체제를 완성할 것으로 예상한다. 호텔롯데는 롯데지주와 롯데쇼핑, 롯데물산 등 핵심 계열사의 주요 주주다. 일본 롯데홀딩스가 지분 100%를 갖고 있어 상장을 통해 일본 자본의 비율을 낮추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는 롯데가 풀어야 할 과제로 이질적인 사업의 융합을 꼽는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국 사업의 손실이 커지자 적절한 시점에 손절매하고, 전혀 다른 업종에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지는 모습에서 신동빈 회장의 결단력이 드러난다”며 “탄탄하게 갖춘 그룹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이종산업간 시너지를 노리고, 동종산업에 종사하는 계열사가 창출하는 시장지배력을 강화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롯데의 위상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 매출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롯데그룹 매출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재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여건 악화에 사업 재편은 환경이 악화하는 기업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실적을 만회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글로벌화와 B2B 사업 강화를 택한 롯데의 선택이 맞는 것이었는지를 판단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올 연말엔 신 회장이 동일인(실제 그룹 회장)으로 지정된 후 두 번째 그룹 인사가 예정돼 있다. 지난해 인사는 신 회장이 석방된 지 2개월 만이라 거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번 인사가 그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첫 번째 인사다. 재계에서는 이번 인사가 사상 최대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거친 풍랑을 만난 신동빈의 롯데호는 어디로 갈 것인가. 서울 잠실 롯데그룹 본사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전영선·문희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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