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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보다 사회적가치, 새 게임하라" 최태원 행복경영 4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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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최태원 SK그룹 회장.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SK그룹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내내 ‘행복 경영’을 연구하느라 골치가 아팠다. 그는 “국내외 경쟁이 치열해 사업하기도 어려운데 사회적 가치도 추구하고, 직원 행복도 챙겨야 하니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5대 그룹 리더십 대변신③ 최태원 SK 회장]

최태원 회장. 자산 218조원, 재계 3위인 SK그룹을 이끄는 수장이다. 요즘 그의 언어는 사회적 가치와 행복이다. 그는 공석에서건, 사석에서건 항상 이 말을 달고 산다. 자연스레 SK그룹 CEO의 최대 관심사는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모두 추구하는 비즈니스 모델(BM·수익모델)이 도대체 뭐냐’로 모였다.

SK그룹 한 임원은 “올해는 계열사 경영성과 평가에 사회적 가치를 얼마나 창출했는지 반영하는 첫해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긴장된다”고 말했다. SK그룹의 또다른 CEO는 “그동안 수익을 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는데 이건 너무 어려운 숙제”라며 울상이다. SK는 2017년 각 계열사 정관을 고쳐 기업의 목적으로 ‘이윤 창출’을 삭제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을 넣었다. 최 회장이 던진 ‘사회적 가치 추구 경영’이라는 화두를 기업의 헌법 격인 정관에 반영하면서 CEO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SK그룹의 성장.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SK그룹의 성장.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최태원 "딥체인지 없인 성장도 생존도 없다" 

이런 CEO에게 최태원 회장의 주문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딥체인지(Deep Change·근본적 변화)하라. 그렇지 않으면 기업은 성장할 수도, 생존할 수도 없다." 지난달 18일 제주도 한 호텔에서 2박 3일간 열린 SK그룹 CEO세미나에서도 최 회장은 계열사 CEO 80여 명에게 "생각의 전환이 더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돈 벌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꾸라는 주문이었다.

“기업이 비즈니스 모델을 체인지한다는 건 ‘기업의 정체성을 바꾸는’ 문제입니다. 현재 상태에다 디지털을 조금 더하는 게 아니란 거죠. ‘굴뚝 기업에서 아예 디지털 기업으로 변신하겠다’여야 합니다. 에너지 기업은 환경 기업이, 통신 기업은 AI(인공지능) 컴퍼니가 되겠다고 해야죠.”

비즈니스모델을 바꾸면 '게임의 룰'도 새로 짜야 한다. 최 회장의 얘기가 이어졌다. “자, 디지털 기업이 되겠다고요? 그러면 이제부터 어떤 게임을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매출 늘리고 비용 줄여서 이익을 많이 내는 게임을 계속할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할지 말이죠. ‘우리는 성장을 좇겠다. 적자가 나도 상관없다. 시가총액을 높이는 전쟁을 하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 여러분이 뭘 해야 합니까? ‘기존 자원을 3년 이내에 다 없애겠다.’ 거의 이 정도까지 생각해야 해요. ”

왜 '사회적 가치'에 빠졌나…'돌연사' 위기감

최 회장이 '딥체인지'를 선언한 지 4년째. 요즘 SK그룹은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다. SK에너지는 주유소를 스타트업과 협업해 택배 플랫폼으로 변신시켰고, SK텔레콤 등 ICT 계열사는 보유한 앱 인터페이스(API)를 모아놓은 포털을 만들고 이를 외부에 개방했다. SK가 가진 유무형 자산을 사회의 공유인프라로 확장하겠다는 취지다. 신에너지ㆍ반도체ㆍ2차전지(배터리)·바이오·모빌리티 같은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다. 조대식 의장이 이끄는 SK 최고 경영 협의기구 SK수펙스추구협의회는 올해초 에너지솔루션TF를 만들었다. SK의 주력인 에너지사업과 통신사업을 결합한 비즈니스모델을 찾고 있다.

최태원 SK 그룹 회장. [사진 SK]

최태원 SK 그룹 회장. [사진 SK]

이런 변신의 중심엔 최 회장이 있다. 정확히는 최 회장의 위기의식이 시발점이다. SK그룹의 ‘사회적 가치 추구 경영’은 2016년 최 회장이 “기업이 이윤만 추구하다가는 돌연사(sudden death)할 수 있다”는 진단에서 출발했다. 2010년대 초반부터 사회적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고민했던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를 경영혁신 전략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 배경엔 냉혹한 현실이 있다.

SK그룹 주력 계열사들은 기존 사업 모델로는 10년 뒤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시장점유율 50%를 쥔 이동통신사 SK텔레콤은 오랫동안 내수 1등에 머물러 있었다. SK텔레콤의 시가총액(4일 종가 기준, 19조950억원)은 AI(인공지능) 기술기업으로 진화한 네이버(27조1120억원)에 추월당한 지 오래다. SK이노베이션 등 석유ㆍ화학 계열사는 저물어가는 화석연료 시장서 빠져나오지 않고선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할 수 없다. 지난해 사상 최대 호황을 기록한 SK하이닉스는 메모리반도체 중에서도 D램 의존도가 80% 이상이다. 최 회장은 이런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며 앞으로도 한동안은 수익을 잘 내겠지만, 이대로는 돌연사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컸다고 한다.

AI와 디지털 전환 없인 도태된다…‘어제의 적’카카오와 손잡아

이럴 때 기업은 보통 M&A로 돌파구를 찾는다. 최 회장은 한 발 더 나갔다. ‘사회적 가치’와 ‘행복’을 화두로 던졌다. “사업하기도 어려운데 사회적 가치까지…”라는 말에 이게 바로 '사업의 본질'이라고 답했다.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는 성장 한계에 부딪힌 기업이 생존을 위해 반드시 찾아야할 ‘블루오션’”이라는 생각이다. 그룹 관계자는 “기업이 계속 생존하려면 이윤뿐만 아니라 환경 보호, AI와 인간의 공존 같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지극히 기업가다운 얘기”라고 말했다.

SK그룹의 최근 5년 투자 규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SK그룹의 최근 5년 투자 규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2017년부터 SK㈜ 사외이사로 있는 장용석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업과 사회 혁신에 대해 최 회장과 오랫동안 토론하고 연구한 학자다. 장 교수는 “소위 ‘거래비용 제로 시대’에는 1인 방송이 거대 방송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데, SK그룹도 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최 회장의 고민이 컸다”며 “이런 기술혁신이 일으킨 변화를 리스크로 보는 기업도 있지만 최 회장은 사업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이 AI와 DT(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같은 기술을 확보하고, 사내 대학(SK유니버시티)을 만들어 직원 교육을 강화하려는 것도 새 시장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역량이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지난 8월 SK이천포럼에서 “DT와 AI라는 툴을 사용하지 못하는 기업은 하청업자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 툴을 쓰는 회사가 고객을 다 가져간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딥체인지를 위해 '얼라이언스(Alliance·연합)'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최근 SK텔레콤과 카카오의 3000억원대 지분 맞교환 결정도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이통사의 문자·통화 서비스를 무력화시키며 성장한 카카오는 네비게이션·AI스피커 등 신사업마다 SK텔레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두어 달 전 최 회장은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의장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받자 흔쾌히 만나 SK텔레콤-카카오 간 지분 맞교환을 승인했다.

SK의 새 실험,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까…“이미 세계의 화두” 

글로벌 경영계의 흐름도 SK그룹의 자신감을 더했다. 지난 8월 애플·페이스북·월마트·펩시·JP모건 등 200개 미국 기업 CEO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은 "앞으로 주주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한 경영을 하겠다고 결의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달 28일자 사설 '책임 있는 자본주의엔 새로운 표준이 필요하다'에서 기업이 포용성과 지속가능성을 갖춘 자본주의를 실천하려면 그런 활동을 측정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자본주의:리셋할 때'라는 캠페인도 하고 있다.

자본시장도 최근 수년 사이 기업의 이익뿐 아니라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임팩트에 주목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연초에 투자기업 CEO에 보내는 서한에서 "양극화와 환경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기업이 보다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며 "사회적 목적이 분명한 기업이 장기적으로 더 높은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SK그룹 관계자는 "우리가 잡은 방향이 글로벌 흐름과도 맞다는 게 확인되면서 회장의 확신도 단단해진 것 같다"고 전했다. SK는 글로벌 기업과 세계은행이 참여하는 국제 연대(VBA)에 참여해 사회적 가치 성과를 측정해 기업의 회계 표준으로 만들 방법을 찾고 있다. 국내에서도 공공기관 28곳은 SK가 설립한 비영리재단 사회적가치연구원과 함께 공공기관 평가에 사회적가치를 반영할 방안을 연구 중이다. “엉성하더라도 성과를 계속 측정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게 최 회장 지론이다.

경영계 안팎에선 ‘사회적 가치’를 재계의 화두로 키워가는 최 회장에 대해 경영자로서 2막을 열었다는 평이다. 1998년 38세에 총수에 오른 최 회장은 첫 10여년 간 SK의 외형적 성장에 집중했다. 신현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의 역할은 소비자의 불편과 필요를 해결해주는 것이고, 그걸 잘 해내는 게 경영”이라며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경영’은 기업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고객의 필요를 해결하겠다고 '기업의 역할'을 재정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버지 고 최종현 회장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의미하는 ‘수펙스(SUPEXㆍSuper Excellent)’로 30년 전 경영 혁신을 이뤘다면, 최태원 회장은 기업이 ‘사회ㆍ경제적 가치’를 모두 추구할 때 임직원ㆍ주주ㆍ사회가 모두 더 행복해진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데 도전 중이다.

설득하는 최태원 '스킨십 리더십'  

'변해야 산다.', '다 바꿔라.' 그동안 한국에선 총수가 한번 말하면 참모가 일사불란하게 구조조정과 M&A 전략을 짜곤 했다. 최 회장도 과거엔 다르지 않았다. 2015년말 경영복귀 후 달라졌다. SK 내외부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뛴다. 이천포럼·소셜밸류커넥트(SOVAC)·IT테크서밋포럼 등 여러 포럼을 만들어 사회적 가치를 논의할 장을 넓혔다. 최 회장은 대부분의 포럼에서 무대에 올라 공유인프라, 사회적가치, 사회적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말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8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대중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번개 행복토크를 열고 구성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SK]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8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대중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번개 행복토크를 열고 구성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SK]

대기업 총수로는 드물게 직원들과 주 2회씩 만나는 스킨십도 눈에 띈다. 올해 초 최 회장은 SK의 경영목표인 '구성원의 행복'에 대해 직원들과 얘기하는 행복토크를 연말까지 100번 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90회를 채웠다. 또 최 회장은 SK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 7개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핵심 계열사 CEO들과 격의 없는 토론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지난 2016년 고 최종현 회장과 함께 일한 SK 1세대 김창근 전 의장의 퇴진 이후, 대부분 최 회장보다 젊은 60년대생 CEO들로 채워졌다. 신현한 교수는 “중요한 의사결정시 최 회장과 계열사 임원들이 굉장히 자유분방하게 의견을 나누고 최 회장이 임원의 의견을 들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SK의 경영 수준은 글로벌”이라고 평가했다.

미래가치 없으면 주력 사업도 판다

인수합병(M&A)으로 성장해온 SK의 M&A 본능은 최근 더 과감해졌다.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시한 대기업집단의 자산규모(2018년말 기준) 순위에서 2위(현대차그룹)와 자산규모 차이는 5조5000억원으로 좁혀졌다. 1년 전만 해도 33조원 이상 차이가 났다.

석유 기반 사업으로 큰 에너지 계열사의 사업재편이 가장 활발하다. 정유 사업으로 성장한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 핵심 부품인 배터리와 석유 대체에너지로 꼽히는 셰일가스로 방향을 잡았다. 미래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매년 수천억 이익이 보장된 안정자산을 과감히 팔고 있다. 지난 9월 SK이노베이션은 천연가스ㆍ원유 생산기지인 페루 광구를 약 1조2000억 원에 팔았다. 화학 기업인 SKC도 지난 8월 영업이익의 75%를 차지하는 화학사업을 분할하고 지분 절반을 해외에 팔았다. 배터리 핵심 소재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이유다.

이외에도 SK그룹은 한때 주력했던 SK해운ㆍSK증권을 매각하는 대신, 반도체 기술 기업(LG실트론ㆍOCI머티리얼즈ㆍ미국 듀폰웨이퍼 사업부)을 샀고, 지주사 SK㈜는 북미 셰일에너지에 대폭 투자하고 있다. 송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저성장ㆍ초경쟁 시대에는 대기업도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지는 비주력ㆍ비핵심 사업을 축소하고 미래 성장동력에 투자하는 사업재편을 선제적ㆍ자발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바메모리 반도체(4조원)나 용인 반도체클러스터(120조원) 투자도 최 회장의 결단이었다.

SK그룹의 주요 인수합병 및 지분투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SK그룹의 주요 인수합병 및 지분투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돈 버는 사회적가치 경영모델, 가능할까 

남은 숙제는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추구 경영이 경제적 가치, 즉 이윤추구를 더 높인다는 가설이 입증돼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의 성명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은 이유도 비슷하다. 지난 8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기업의 목적’을 이윤추구보다 사회적 기여에 방점을 두는 최근의 움직임이 주주의 대리인에 불과한 경영자가 오히려 주주의 이익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 영향을 받는 한국의 국민연금과 달리, 민간 기관투자자도 기업의 이런 움직임에 반대하는 분위기다.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의 창업자 폴 싱어는 이 잡지에 “(인구고령화ㆍ저출산 등의 영향을 받는)연기금이나 대학ㆍ병원 등의 수익성 문제를 흐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장용석 교수는 "기업이 혁신 기술로 성장하는 동시에 사회적 기여를 더 해야 한다는 요구는 전 지구적인 현상"이라며 "기업이 이윤 이외에 다른 가치를 제공하는 역할로 기업의 정체성이 바뀌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3년 안에 기존 자산을 매각할 정도'로 생각을 바꾸라는 최 회장의 말대로, 자산 218조 그룹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까. 두 마리 토끼(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다 잡을 모델은 언제 내놓을 것인가. 제조 경쟁력을 갖춘 삼성·현대·LG에 비해 글로벌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한 SK는 사회적 가치 추구 경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 최 회장이 사장에게 묻듯, 시장은 최 회장에게 묻고 있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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