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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일자리·비정규직 악순환···일자리정책 '트릴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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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트릴레마’(Trilemmaㆍ삼각 딜레마)에 빠졌다. 최저임금 인상, 일자리 증대, 비정규직 감소라는 정부의 정책 목표가 서로 얽혀 어느 한쪽을 풀려면 다른 한쪽이 꼬여버린다. 이 3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게 정부의 '이상'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다.

[주말PICK]

2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9만7000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있었던 2009년 이후 9년 만에 최저치다. 지난해 인구효과(전년도 고용률이 유지된다고 가정할 경우 인구증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취업자 증감분)는 15만2600명이었는데, 이에도 5만5600명이나 못 미쳤다. 취업자 수 증가 폭이 인구 효과를 밑돈 것도 2009년 이후 처음이다. 경기 둔화에 제조업 구조조정 등으로 고용이 부진한 상황에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이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다.

“경제가 성장할 때 최저임금을 올려야지 하강국면에서 올리면 중소기업인 자영업자들에게 근로자를 해고하라고 강요하는 꼴이 될 것”(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최저임금이 큰 폭으로 인상된 것은 사용자 입장에서 큰 부담”(더불어민주당 최운열 의원) 같은 비판의 목소리가 여당 내에서 나올 정도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다급해진 정부는 올해부터 세금을 쓰는 공공부문 일자리를 크게 늘렸다. 어린이 놀이터 지킴이, 교통안전 캠페인, 골목길 담배꽁초 줍기, 농촌 비닐걷이 등 고령층이 주로 일하는 단기 일자리가 대표적이다. 덕분에 올해 3분기까지 취업자 증가 폭은 월평균 26만명을 기록했다. 8월과 9월에는 각각 45만2000명, 34만8000명이 늘어나는 등 고용 상황이 양적으로 뚜렷한 개선 흐름을 보였다.

문제는 ‘고용의 질’에서 터져 나왔다. ‘2019년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정규직 근로자 수는 1307만8000명으로 전년 대비 35만3000명 줄었고, 비정규직은 748만1000명으로 지난해보다 86만7000명 증가했다.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연간 비정규직 증가 규모가 1만~3만명 내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올해 비정규직 증가 폭은 폭발적인 수준이다.

이에 따라 전체 근로자 중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36.4%로 전년(33%)보다 3.4%포인트나 급등하며 2005년 8월(36.6%)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비정규직 제로’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고용의 질은 개선됐다"고 계속 강조해온 문재인 정부에서 비정규직은 폭증하고, 정규직은 줄어드는 역설적인 결과가 나온 셈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통계청장을 지낸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통계 수치가 일자리 정책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며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니 고용시장이 얼어붙었고, 이를 풀기 위해 정부에서 단기 일자리를 늘리니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고용의 질이 나빠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일자리 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런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통계 조사 방식을 바꿨더니 비정규직 규모가 35만~50만명가량 추가로 포착됐다며 강신욱 통계청장이 직접 나와 “작년과 단순 비교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올해 비정규직은 최소 36만7000명에서 최대 51만7000명이 증가했다. 정부가 함께 내놓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임시근로자(Temporary Workers) 기준으로 봐도 임시근로자는 올해 500만9000명으로 전년보다 76만7000명 증가했고, 전체 임금근로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21.2%에서 24.4%로 증가했다.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평균 임금 차이, 근속기간 차이도 더 벌어지는 등 다른 고용의 질도 나빠졌다.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이 “통계청이 말하는 ILO의 새로운 조사방식은 8월의 근로형태별 부가조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국민과 언론은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조사 기준이 바뀌었다고 비정규직 숫자가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을 바보로, 원숭이로 알고 조삼모사(朝三暮四)로 국민을 상대로 정부가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 격한 반응을 보인 이유다.

2019년 산업별 비정규직 증감률.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2019년 산업별 비정규직 증감률.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원론적이다. 기획재정부는 관련 발표 이후 ‘보도참고 자료’를 통해 “상시·지속 업무의 정규직 고용 원칙 하에 기존 비정규직 대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며 “기업의 자율적 정규직 전환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제도개선 방안 등에 대해서도 노사 등과 지속적으로 논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결국 기업들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앞으로도 계속 ‘독려’ 혹은 ‘압박’하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기업들의 입장은 난처하다. 추가 채용 여력이 부족해서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기본급만 오르는 게 아니다. 기본급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상여금과 수당 등도 덩달아 오르는 임금 구조라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은 이미 크게 늘었다. 인건비 상승 압박이 커진 기업들은 채용을 줄인다. 특히 정규직은 한번 뽑으면 정년까지 해고하기 어렵고 호봉도 계속 올려줘야 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대상이 되는 사람은 좋겠지만 새로운 취업문은 좁게 만든다. 결국 이런 정책은 일자리 확대와는 양립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한국경제연구학회장을 지낸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내년에는 세계경기 둔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올해 기저효과로 취업자 수 증가 폭은 다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며 “민간의 일자리 수요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일자리 정책이 서로 상충(相衝)하면 정부의 트릴레마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선의를 가지고 추진한 정책이더라도 부작용이 커진다면 현실에 맞게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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