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왜 굳이 험한 길 자초할까…붉은선비 앞의 네 가지 금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45)

아침 바람에 목이 간질간질 한 것이, 찬 기운이 몰려오는 계절임을 실감하게 한다. 가을 꽃놀이도 잠시, 한라산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언제 그렇게 더웠는가 싶다. 일상에 쫓겨, 세상사에 찌들어 살다가도, 코스모스 만발, 단풍 절정 이런 소식에 얼핏 눈이 뜨이기도 한다. 이 계절을 그냥 보내면 안 될 것만 같다.

우리는 잠시 잊고 있을 뿐, 자연 속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문명 속에서 인간들에 치여 살면서 그 상처를 치유해 보겠다고 자연을 찾아가며 ‘힐링’을 외치곤 한다. 이런 역설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문득 놀랍다. 적극적으로, 본격적으로 자연을 해치며 문명을 일구어 살면서 그 속에서 상처받고 힘들어하다가, 그걸 어찌 좀 달래 보겠다고 자신들이 파헤치고 해하다 몇 조각 남은 그 자연을 꾸역꾸역 찾아간다.

유럽 사람들은 서울 한복판에 제법 오르기 힘든 높은 산이 있는 것에 놀란다. 산이 많은 이곳엔 산신령이 산다. 본 사람은 없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존재가 산신령이다. 사진은 북한산 의상봉 국녕사 단풍. [중앙포토]

유럽 사람들은 서울 한복판에 제법 오르기 힘든 높은 산이 있는 것에 놀란다. 산이 많은 이곳엔 산신령이 산다. 본 사람은 없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존재가 산신령이다. 사진은 북한산 의상봉 국녕사 단풍. [중앙포토]

지독한 교통체증과 함께. 해치러 가는 것인지, 치유하러 가는 것인지, 치유하기 위한 길이 또다시 자연을 해치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까지는 미처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산천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망가져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이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 사는 이 작은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유독 산이 많기도 하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서울 한복판에 제법 오르기 힘든 높은 산이 있는 것에 놀라고 우리는 너른 들판 저쪽 끝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평선에 놀라고. 숲이 많은 유럽에선 숲속에 난쟁이들이 살지만 산이 많은 이곳에선 산속에 산신령이 산다. 본 사람은 없어도 누구나 알고는 있는 존재가 산신령이다. 많은 등산모임, 산악회에서는 여전히 봄에 산길이 열릴 때 시산제를 올리고 무속인들은 영험한 산에서 기도를 올린다.

산천굿이 경계하는 인간의 오만함

산마다 깃들어 있는 산신령의 기원을 알리는 신화가 있다. 함경도 지방에서 전해지는 ‘망묵굿’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산천굿’이다. 명산대천에 기도하여 망자의 평안과 가족의 길복을 기원하는 굿인데, 여기에서 ‘붉은 선비와 영산 각시’ 이야기가 구연된다. 이 신화는 산신령의 기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붉은 선비와 영산 각시는 본래 하늘에서 옥황상제를 받들었는데 실수를 하여 인간세상에 유배된 인물들이다. 지상에서 영산 각시를 만나 결혼한 붉은 선비는 얼마 후 공부하겠다며 절에 들어갔다. 그러나 각시와 부모가 보고 싶어 절을 떠나려고 하였다.

붉은 선비의 스승은 날이 좋지 않으니 다음에 가라고 했지만 붉은 선비가 말을 듣지 않았다. 스승은 정 그렇다면 지금 가되 반드시 다음 네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첫째, 목이 말라도 길 위의 맑은 물이 아니라 길 아래의 흐린 물을 마셔야 한다. 둘째, 머루, 다래, 포도가 익어가는 것을 보더라도 따 먹지 말아야 한다. 셋째,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도 피하지 말고 계속 길을 가야 한다. 넷째, 불 타는 나무 위에서 새파란 각시가 불을 꺼달라고 소리 치는 것을 보더라도 각시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이야기 속 금기사항은 우리 문명인의 시각으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알라딘'에도 램프를 꺼내오기 위해서는 동굴 가득 쌓인 금은보화에 손을 대어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등장한다. [사진 영화 '알라딘' 스틸]

이야기 속 금기사항은 우리 문명인의 시각으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알라딘'에도 램프를 꺼내오기 위해서는 동굴 가득 쌓인 금은보화에 손을 대어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등장한다. [사진 영화 '알라딘' 스틸]

이야기 속의 금기사항들은 우리 문명인의 시각으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다. 얼마 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알라딘'에서도 깊은 동굴 속 램프를 꺼내오기 위해서는 동굴 가득 쌓여 있는 금은보화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등장하였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오래된 교훈은, 목표를 위해서, 혹은 진짜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의연함이 필요하다는 것이겠으나, 산천굿의 금기는 굳이 더욱 험한 길을 자초하는 방식이니 왜 그래야 하나 싶은 답답한 마음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미 우리가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서 학습해 왔듯이, 이야기 속의 금기는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붉은 선비 역시 ‘나 스스로 깨끗하고 당당한 선비인데 왜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맑은 물을 마시고, 머루 다래를 따 먹고, 비도 피하고, 각시도 구해 주었다. 하지 말라는 일을 했으니 반드시 사달이 날 것인데,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불 타는 나무 위의 각시’는 마치 사이렌처럼 붉은 선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사악한 힘이었으니, 선비가 불을 꺼주자 각시는 대맹이로 변신하여 붉은 선비를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대맹이, 혹은 대망이 등으로 표기되는 이 존재는 대망신(大亡神), 즉 이무기이다. 맑은 물과 머루 다래, 비는 이무기가 승천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었다. 때가 좋지 않다고 했던 것은 이무기가 승천하는 날이라는 것인데, 이럴 때 인간이 조신하지 못하게 행동하여 그걸 방해하면 반드시 화를 크게 입을 것이었으므로 스승은 그 네 가지만 조심하라고 했던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붉은 선비는 자신은 오대 독자로서 부모를 뵈어야 한다며 대망신에게 통사정을 하여 며칠 말미를 겨우 얻어냈다. 그러고는 집에 얼른 가서 영산 각시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였고, 영산 각시는 칼을 품은 채 대망신에게 가서 남편을 잡아먹으려거든 자신이 먹고 살 길이나 마련해 달라고 따졌다. 그러자 대망신이 팔모야광주를 내주었는데, 각 모마다 쓰임새가 있다.

마지막 모의 쓰임새는 대망신이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영산 각시가 대망신의 멱살을 잡고 칼을 들이대며 위협하여 겨우 알아내었다. 대망신은 결국 그 때문에 죽게 되는데, 마지막 모의 쓰임은 미운 자를 겨냥하여 던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영산 각시는 그 모를 대망신에게 겨냥하여 던졌고, 날 잡아 승천하려던 이무기는 그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다하였다.

산마다 깃들어 있는 산신령의 기원을 알리는 신화가 '산천굿'이다. '산천굿'은 함경도 지방에서 전해지는 ‘망묵굿’ 안에 포함되어 있다. 사진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있었던 함경도 망묵굿 현장. [사진 김수남, 문화콘텐츠닷컴]

산마다 깃들어 있는 산신령의 기원을 알리는 신화가 '산천굿'이다. '산천굿'은 함경도 지방에서 전해지는 ‘망묵굿’ 안에 포함되어 있다. 사진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있었던 함경도 망묵굿 현장. [사진 김수남, 문화콘텐츠닷컴]

작은 칼 하나 품고 가서 대망신에게 대드는 영산 각시도 대단하지만, 영산 각시가 그렇게 위협한다고 해서 팔모야광주를 내어 주고, 그것의 쓰임새를 알려 주어 죽음을 자초하는 대망신도 결국은 승천할 만한 힘을 충분히 갖추지는 못했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대망신을 쓰러뜨린 영산 각시는 대망신을 화장하고 그 재를 조선 팔도에 던졌다. 그것이 한반도 팔대 명산, 꽃과 돌의 신령이 되었고, 물에 뿌려진 재는 각종 짐승이 되었다. 산천을 지키는 신과 생명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였으니 영산 각시는 창조여신이 될 것이다. 영산 각시가 이렇게 활약하는 동안 붉은 선비는 금기를 어긴 죄로 동티가 나서 죽을병에 걸렸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산천굿을 드리게 되었다.

함부로 하지 않고 조심할 것은 조심하고

붉은 선비와 영산 각시가 애초에 하늘에 있을 때 저지른 실수도 옥황상제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다루지 못하여 하늘에서 떨어뜨린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조심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붉은 선비가 조심하지 못했던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함부로 여긴 것이기도 하고, ‘내가 선비인데’ 하는 자의식이 발동시킨 것이기도 하다.

세속적인 욕망, 금은보화에 눈이 뒤집히는 수준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도 무시하고 자신의 자의식대로 행동하는 오만함에 대한 경계이다. 자연 대 인간의 대결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의미라는 것이 굳이 ‘자연을 경배하라’는 아닐 것이다.

자연마저도 함부로 대하는 태도는 우리 앞에 하나의 자연으로서 오롯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오만함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일 테다. 인간과 자연이 다른 것일까. 인간도 자연으로부터 나고 자연 속에서, 자연을 통해 살아가며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 그 자체인 존재들 아닌가.

국립국악원에서 11월부터 선보이는 뮤지컬 '붉은 선비'. 산천굿 신화를 각색했다. [사진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원에서 11월부터 선보이는 뮤지컬 '붉은 선비'. 산천굿 신화를 각색했다. [사진 국립국악원]

상징성 강한 신화에서 자연과 인간, 혹은 자연에 대항하는 문명의 대결 구도 혹은 문명화의 과정을 찾아내곤 하지만, 자연이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조금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산 각시가 반도 각지에 뿌린 대망신의 재가 팔도명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것도 달리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하다. 이 대망이 역시 하늘에서 득죄하여 이무기 상태에 머물러 있다가, 맑은 물과 머루 다래, 비, 불 타는 나무의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하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죄를 지어 벌을 받던 존재가 본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걸 이루지 못했다. 이 대망이가 제대로 승천하였다면 이것은 완전히 다른 방향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산신령은 산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가끔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여 오만하고 조심성 없는 인간들에게 호통을 치고 벌을 내린다.

‘함부로 하지 않는다, 조심할 것은 조심한다, 당부나 금기를 귀담아 듣는다’ 등으로 표현되는 태도는 산천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언술을 넘어선다. 자연을 파괴하여 지은 문명 속에서 아파하다 자연을 망쳐가며 자연을 찾아가서 힐링을 외치는 역설은 인간 또한 자연일 수 있음을 헤아리는 철학이 부재하기에 발생한다.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