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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라고 홀대한 죄…부잣집 아들에게 내린 무서운 병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43)

요새 복고풍을 즐기는 ‘레트로(retro)’라는 취미가 유행이다. 21세기 태생의 젊은이들이 신기한 듯 향유하는 복고풍 문화가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어서 복고풍 유행 현상을 보며 새삼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내게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비디오테이프이다. 요새는 영화도 거의 인터넷으로 보는 세상이라 VHS나 비디오테이프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이들도 많겠다. 나는 주말엔 비디오 대여점에서 한두 편씩 빌려와 영화를 보곤 하였는데, 이때 영화 시작 전에 꼭 건전비디오 캠페인이 삽입돼 있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문구가 등장한다.

역병과 ‘마마신’ 모시는 제사

예전 비디오에 삽입된 '건전비디오' 캠페인에는 '호환' '마마'가 등장한다. [사진 유튜브 캡처]

예전 비디오에 삽입된 '건전비디오' 캠페인에는 '호환' '마마'가 등장한다. [사진 유튜브 캡처]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수한 영상 매체인 비디오를 바르게 선택, 활용해 맑고 고운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되어야겠습니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밝고 고운 심성을 가진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어른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이 비디오테이프마다 심어져 방방곡곡 울려 퍼지던 시절이었다. 저 유명한 경고 문구는 사실 불량·불법 비디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보다는 ‘호환, 마마’라는 개념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키우기도 했는데, 아직도 이게 뭔지 모르는 이들이 꽤 많을 것이다.

호환이야 호랑이한테 물려가는 일을 이르는 것이고, 마마는 천연두를 일컫는다. 두창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하는 이 병은 물집이 생기는 증상 때문에 병이 낫고 나서도 피부에 얽은 자국을 남긴다. 그래서 그 흉터가 얼굴에 많이 남은 사람을 ‘곰보’라고 부르면서 멸시하기도 했던 것인데, 근래에는 이런 얼굴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강력한 전염성을 가진 전염병인 데다,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흉터를 남기는 병이니 세상 무서운 병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마마신’을 모시며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 마마신의 노여움을 풀고 역병을 예방하고자 했다.

서울 및 중부 지역에서는 ‘별상거리’ 또는 ‘호구거리’라고 하며, 호남 지역에서는 ‘손굿’이라고 하고 제주도에서는 ‘마누라배송’이라고 하며, 동해안 지역에서는 ‘손님굿’이라고 한다. 사진은 책「마마신 손님네」표지. [사진 한림출판사]

서울 및 중부 지역에서는 ‘별상거리’ 또는 ‘호구거리’라고 하며, 호남 지역에서는 ‘손굿’이라고 하고 제주도에서는 ‘마누라배송’이라고 하며, 동해안 지역에서는 ‘손님굿’이라고 한다. 사진은 책「마마신 손님네」표지. [사진 한림출판사]

그 마마신과 관련한 이야기가 ‘손님굿’을 통해 전해진다. 강남대왕국의 손님네 넷이 이 땅에 구경을 왔다가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김장자네 집에 들르게 되었다. 큰 부자였지만 인심이 사나웠던 김장자는 낯선 이들을 박대하며 내쫓았고, 잠시 헤매던 손님네가 찾아든 곳은 김장자네 방아품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노고할미네 오두막이었다. 노고할미는 쌀 한 톨 갖고 있지 않았지만 강남대왕국에서 온 손님네라 하니 어떻게든 대접을 하고 싶어 김장자네서 쌀을 꾸어다 죽을 쑤어 주었다. 손님네는 고마워하면서 이 집에 아이가 있으면 마마를 살짝만 앓고 지나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노고할미는 외손녀가 하나 있지만 너무 가난한 살림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김장자네 삼대독자인 철현이나 잘 돌봐 달라고 했다. 손님네도 허락해, 이 사실을 김장자에게 알려주기 위해 노고할미가 김장자를 찾아갔지만 노고할미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대신 손님네는 배송(拜送)을 잘 해주고 싶어 하는 노고할미의 마음을 헤아려 돈을 주며 배송굿을 크게 치를 수 있게 해 주었다.

김장자는 노고할미가 쌀을 빌려 가고는 며칠째 방아일을 하러 오지도 않으니 괘씸한 생각에 노고할미네 찾아갔다. 노고할미네가 거창하게 제물을 장만하고 손님을 배송한다며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고는 형편없는 떠돌이 손님을 불러다 놓고 이게 다 무슨 일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손님네는 김장자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나 철현이에게 마마를 세게 내렸다. 아이가 아파하며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자 김장자는 억지로 손님네에게 빌었다. 손님네가 마마를 거두어 아이가 살아난 뒤 김장자 부인이 손님네 대접을 잘 해주자고 하자 김장자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또 버럭 화를 냈다.

손님네는 괘씸한 김장자를 벌하기 위해 철현이에게 다시 마마를 내려 결국 철현이가 죽었다. 그리고 철현이를 데리고 방방곡곡 다녔는데, 강남대왕국 가기 전에 부모 얼굴이나 보고 가게 해달라는 철현이의 청을 듣고 김장자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고래등 같던 기와집은 온데간데없고, 부부가 짚신을 삼아 팔며 근근이 살고 있었다. 손님네는 철현이를 불쌍하게 여겨 김장자에게 재물을 다시 찾도록 해준 뒤 삼 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아이들에게 무병장수하게 해주고, 많은 복을 준 뒤 돌아갔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홍역이나 결핵 등 후진국형 전염병은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발생 사례가 보고 되고 있다. 근래엔 신종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출몰하고 있다. 과거엔 그저 독감이라고 불렸던 신종플루가 대표적이다. 신종 바이러스는 약으로는 치료도 잘 안 된다. 잘 치료하기도 힘들어졌다.

최근 국내에 바이러스성 출혈성 돼지 전염병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했다. 사진은 경기도 연천군의 한 양돈농가에서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살처분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최근 국내에 바이러스성 출혈성 돼지 전염병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했다. 사진은 경기도 연천군의 한 양돈농가에서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살처분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 발생하는 전염병도 크게 문제가 되는데, 최근에도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해 축산농가를 또 시름에 잠기게 했다. 이 병은 국내에서는 아직 발생한 적이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출혈성 돼지 전염병이다. 급성형에 감염되면 치사율이 거의 100%에 이른다는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덜 조리된 돼지고기, 건조·훈연·염장 처리된 돼지고기, 혈액, 돼지에서 유래한 사체잔반(carcass meal) 등을 돼지에 급여하면 질병이 전파될 수 있다고 한다.

손님굿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신적 존재에게 제사를 열심히 지내 전염병을 막아내자는 것이 아니다. 손님네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무례하게 굴어 화를 자초하는 김장자를 보며 어느새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김장자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다.

김장자는 집안 재물을 지키는 데에만 골몰했던 인물이다. 본래 가진 자일수록 베풀어야 한다는 관념은 우리 전통 속에서도 깊이 박혀 있다.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 많이들 알고 있을 터다. 올봄에 이 지면에서도 소개했던 ‘손님 싫어하다 망한 부자’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김장자는 강남대왕국에서 왔다는 손님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문전박대했다. 이는 딱히 얻을 것이 없는 낯선 이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덜어내어 대접할 이유가 없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손님네가 자신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기도 하다. 재물을 깔고 앉은 이들의 전형적인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이다.

“낯선 이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

천연두 접종을 하고 있는 어린이. [중앙포토]

천연두 접종을 하고 있는 어린이. [중앙포토]

그러니 김장자가 손님네에게 가졌던 태도, 그로 인해 김장자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자초지종을 살피는 것은 단지 역병을 몰고 다니는 신을 대접해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미신을 강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삶의 태도가 김장자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은 누구를 대하든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헤아리는 계산적인 태도, 낯설거나 잘 모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무례함, 질병 등 당연하게 찾아올 수 있는 인간사에 맞서는 오만함 때문이다. 마마는 살짝 앓고 지나가면 이후로는 평생 걸릴 일이 없는 병이기도 하다.

내게도 어렸을 때 마마를 앓았던 흉터가 왼쪽 눈썹 위 희미한 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러고는 여태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 병을 앓음으로써 면역이 생겨 병을 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우리는 병을 무조건 피하려고만 한다. 피해야 하는 대상이므로 손님네는 무섭고 낯선 존재일 뿐이고,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그들에게 무례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손님네가 상징하는 무서운 전염병을, 그 자체로 보기보다 조금 넓혀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될 거의 모든 인간사, 인생사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옛날 새벽 첫 우물물로 정화수를 떠놓고 뒤꼍에 정갈하게 상을 차린 후 정성을 다해 두 손 모아 빌던 사람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자식이 마마를 앓고 난 뒤 마마를 내린 신을 위해 제물을 마련하고 두 손 모아 빌며 배송하던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으로부터 남을 존중하는 태도가 생겨나고, 이런 겸허한 태도가 삶을 정갈하게 만들어 간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잃어가는 것이 바로 이런 태도이고, 이로부터 스스로 자초한 어려움 속에 허덕이고 있는 것 같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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