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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방울방울…점순이와 카오루를 만나러 가는 여행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38)

“여기가 거기라지? 꺄!”

최근 강릉 주문진의 작은 버스 정류장 앞에선 이런 탄성이 끊이질 않는다. 21세기 비틀스로 불리며 국내외 팬들을 열광시키는 BTS 덕분에 최근 부산, 강릉, 담양 등이 한국 관광명소, 일명 방탄 성지순례장소로 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앨범 재킷을 촬영했던 장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화 속 배경이 된 식당이나 도시를 찾아가는 테마 여행이 트렌드가 된 지는 오래다. 나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나러 가는 테마 여행을 떠나보았다. 이른바 나만의 문학기행이다.

나만의 문학기행에서 만난 김유정의 『동백꽃』주인공 점순이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주인공 카오루 /갤럭시탭s3.아트레이지사용. [그림 홍미옥]

나만의 문학기행에서 만난 김유정의 『동백꽃』주인공 점순이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주인공 카오루 /갤럭시탭s3.아트레이지사용. [그림 홍미옥]

당차고 야무진 시골 소녀 점순이와 순수한 무희 카오루

“너 배냇병신이지? 느이 아버진 고자라지?”
암만 생각해도 열일곱 처녀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독자들이 쿡쿡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그 처녀는 점순이다. 아시다시피 작가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 주인공이다. 요즘 세상이야 당차고 야무진 여성이 당연한 세상이지만 저 시절만 해도 흔치 않은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지난달 '청춘열차'라는 설레는 이름의 기차를 탔다. 풀어쓰자면 청량리에서 춘천 가는 기차다. 종착역을 두어 정거장 남겨두고 '김유정 역'에 내렸다. 국내 최초로 기차역에 사람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역 앞의 아름다운 실레마을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사춘기 소년·소녀가 사랑에 눈 떠가는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 『동백꽃』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작가 김유정의 단편 『봄봄』의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 주인공 '나'는 좀체 키가 자라지 않는 '점순'이 안타까울 뿐이다.[사진 홍미옥]

작가 김유정의 단편 『봄봄』의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 주인공 '나'는 좀체 키가 자라지 않는 '점순'이 안타까울 뿐이다.[사진 홍미옥]

『동백꽃』의 한 장면, 점순의 수탉이 '나'의 고추장까지 먹인 닭을 몰아세우고 있다. 안타까운 주인공의 모습이 익살맞게 표현되어 있다. [사진 홍미옥]

『동백꽃』의 한 장면, 점순의 수탉이 '나'의 고추장까지 먹인 닭을 몰아세우고 있다. 안타까운 주인공의 모습이 익살맞게 표현되어 있다. [사진 홍미옥]

마을은 요절한 작가 김유정을 소설 속 장면을 그린 조형물, 생가, 기념관으로 추억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키가 안 자라서 속상한 『봄봄』의 점순이가 있다. 몇 걸음 내디디면 닭싸움을 핑계로 깜찍한 수작을 거는 『동백꽃』의 점순이도 있다. 독자들도 벌써 눈치를 챘건만 끝까지 점순의 마음을 모르는 주인공 머스마인 '나'는 점순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듯 보였다.

주변엔 소설 속 생강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알싸한 향기를 풍긴다는 생강나무가 이런 것이구나! 동백꽃은 우리가 아는 그 붉은 동백은 아니다. 작가의 고향인 실레마을 금병산 자락에 지천으로 피는 노란 꽃이 생강나무 꽃이다.

저기 어딘가에서 거의 강제로 고추장을 먹은 닭이 '점순'과 '나'의 신경전(?)을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설 『동백꽃』은 실레마을의 생강나무와 담벼락 위에서도 숨 쉬고 있었다. 당차고 야무진 강원도 소녀 점순이가 있다면 바다 건너 일본 이즈(伊豆)반도엔 순수한 무희 '카오루'가 있었다.

소설『이즈의 무희』의 두 주인공인 '나'와 무희 '카오루'가 잠시 쉬어가는 나나다루폭포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사진 홍미옥]

소설『이즈의 무희』의 두 주인공인 '나'와 무희 '카오루'가 잠시 쉬어가는 나나다루폭포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사진 홍미옥]

“아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 싶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 산기슭으로부터 나를 쫓아왔다.”

노벨상에 빛나는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 첫 도입부다. 아련한 첫사랑의 그리움을 담백하게 표현해 그의 대표작인 설국과 함께 사랑받는 작품이다.

첫 문장의 그 '아마기(天城)고개'는 폐쇄됐다. 그리 높지 않은 산길을 낑낑대고 올라갔지만, 소설 속 산기슭 찻집도 인적도 없었다. 하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마기터널'엔 학생모를 쓴 주인공 '나'와 장식용 머리를 과하게 얹은 14세 소녀 무희 '카오루'가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상상에서다.

이곳 이즈지역 역시 『이즈의 무희』를 기념하는 행사나 조형물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해마다 무희축제를 열기도 하고 소설 속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여행상품도 인기라고 한다. 이곳을 오가는 기차는 아예 무희를 뜻하는 '오도리코'로 이름 지어졌을 정도다. 주인공들이 잠시 쉬어갔던 폭포에는 예의 조형물이 어김없이 자리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 좋겠어요.” 아직은 순수한 무희 카오루는 근사한 학생모를 쓴 주인공에게 말한다. 가는 곳마다 유랑가무단과 개는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처럼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우리 씩씩한 동백꽃의 점순이었다면 그런 신분쯤이야 아무 문제도 안 되었겠다 싶다. 그래선가? 『동백꽃』의 실레마을은 닭싸움만큼이나 분주하고 떠들썩했다. 또한 『이즈의 무희』의 아마기고개는 쓸쓸하고 버려진 듯한 느낌이 소설 속 이야기와 똑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현실 속 스타를 찾고 또 누구는 추억을 되새기는 요즘 여행 

요즘처럼 테마 여행이 인기 있기 한참 전엔 주로 패키지 단체여행이 성황했다. 소문난 유적지를 찾아 사진을 찍고 다음 명소로 떠나는 게 여정의 대부분이었다. 간혹 배낭을 지고 자유 여행을 다녀오는 이들의 무용담이 방송을 타는 등 화제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여행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삶 그 자체가 되기도 하고 고단한 세상에 휴식이 되어주기도 한다. 커피 맛이 좋다는 카페만 골라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릴 적 살던 고향 길목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도 있다. 이 가을, 그리운 누군가를 찾아 떠나거나 혹은 꿈꿨던 장소를 찾아 훌쩍 나서 보는 건 어떨까!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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