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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하기 가장 좋은 나이는? 원하는 삶 시작하는 바로 지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36)

'혹시 들어는 봤나요?' 아미, 유카리스, 원스, 유애나 등. 다름 아닌 최고인기 스타의 팬클럽 명칭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모임인 팬클럽, 그 대열엔 중장년층도 빠지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커지는 팬덤 현상은 최근 들어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연예인뿐만 아니라 예술작가나 문학 장르 혹은 물건, 이를테면 전자기기에도 팬덤은 존재한다. 애플이냐 갤럭시냐를 두고 팬들 간의 자존심 대결도 만만찮다. 바야흐로 덕후들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밍아웃, 어덕행덕, 덕메? 이건 또 무슨 말이람.'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단어, 신조어인지 유행어인지 아리송하다. 뜻을 풀어보자면 '덕질'이란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해 그와 관련된 것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을 말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명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 속 배경을 찾아갔다.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유화브러시 사용. [그림 홍미옥]

빈센트 반 고흐의 명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 속 배경을 찾아갔다.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유화브러시 사용. [그림 홍미옥]

고흐가 빵을 주나 모네가 꽃을 주나? 그러게 말이다. 말 그대로 고흐가 빵을 주기를 하나, 세잔이 사과 한 알을 던져주기를 하나, 아님 모네가 수련 한 송이를 건네주기를 하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의 그림과 스토리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모임이 그것이다. 한 달에 두어번씩 모이는 모임은 언제나 미술 이야기로 시작해서 미술로 끝이 난다. 한밤중에도 단체대화방은 그림 이야기로 북적대기 일쑤다.

모임의 면면은 40~50대의 중년 주부들이다. 전공자도 아니고 그저 미술이 좋아서 만난 사람들인데 열정이 보통 아니다. 엄마의 손이 한창 필요할 자식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알고 싶고 시작하기 딱 좋을 시기여서일까?

뜬구름만 같았던 미술이라는 것에 기꺼이 푹 빠져들었다. 시험공부를 하듯 작품을 검색하고 정리하고 어색하기만 했던 토론이라는 것도 했다.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일상생활에 써먹을 것도 아닌 미술 이야기에 그토록 빠져들다니! 우리 나이에 어디 가서 이런 미술 이야기를 하며 놀겠냐며 스스로 뿌듯해하기도 했다.

길고도 장대한 미술사를 공부하고 알아갈수록 좋아하는 화가가 생겨나는 법인가 보다. 아이돌 멤버도 각자의 팬층이 있듯이 우리가 좋아하는 화가와 그림들도 제각각이다. 물론 수시로 바뀌기는 하지만. 내 경우에는 카라바조에서 코로, 유메지와 베르메르, 고흐, 클로드 로렝 등 많기도 하다. 허구한 날 그림검색에 빠진 나를 보고 가족들은 말하곤 한다. '고흐가 밥을 주나 모네가 꽃을 주나?'라고.

서울시민자유대학에서는 분기마다 미술 강좌를 연다. 사진은 최연욱 작가의 서양미술사 강좌. [사진 홍미옥]

서울시민자유대학에서는 분기마다 미술 강좌를 연다. 사진은 최연욱 작가의 서양미술사 강좌. [사진 홍미옥]

아이돌 스타도 현존한 유명인도 아닌 미술을 향한 덕질은 정보가 필수다. 언젠가 중앙일보에 '톡톡 더,오래' 특강에서 강사가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인생후반전을 준비하기 위한 양질의 배움은 정보력에 달렸다는 거다. 찾아보면 얼마든지 필요한 강좌는 널렸다. 게다가 수강료는 거의 무료나 교통비 수준이다. 취미와 덕질에도 준비가 필요하듯 요즘 세상에 재빠른 정보는 필수다.

다행히 분기별로 자치단체나 도서관, 주민센터 등에서 다양한 강좌가 개설되고 있다. 조금만 품을 팔면 양질의 강좌가 수두룩하다. 내가 '미술 이야기'에 빠지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서양화가 최연욱 작가의 반 고흐 미술특강이 시작점이었다. 교과서와 미술사 책으로는 알 수 없었던 그림이나 화가에 얽힌 일화 등을 재밌고 쉽게 풀어내는 강사의 강의에 푹 빠져버렸다.

그림 속 배경이며 생활상, 그림 속 주인공이 먹던 음식까지 알면 알수록 온갖 게 다 궁금해졌다. 관심 분야에 대한 자료를 찾고 배우고 하는 일이 점점 더 즐거워진 것이다. 이제야 나만의 놀이가 생겼다고나 할까?

마침내 나만의 놀이를 찾아 떠나본 중년 덕후의 여행

프랑스남부 아를 론강.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그려졌던 배경이다. [사진 홍미옥]

프랑스남부 아를 론강.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그려졌던 배경이다. [사진 홍미옥]

인상파 모네의 집 정원 <수련> 연작의 배경이 된 장소다. [사진 홍미옥]

인상파 모네의 집 정원 <수련> 연작의 배경이 된 장소다. [사진 홍미옥]

그 자리에서 그 강을, 계단을, 나무를, 햇빛을 보고 싶었다. 어디에서? 그림 속 배경에서. 거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화가와 함께 걷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관광이 아닌 나의 덕질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렵사리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태어난 아를에 도착했다. 미술애호가들에 이곳은 소위 성지순례라고 불리며 사랑받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가 살았던 노란 집은 사라지고 아를의 밤은 별이 빛나는 밤도 아니었고 까마귀가 날던 밀밭은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린 터였다. 하지만 이 오솔길을 터벅터벅 걸어갔을 화가의 외로웠을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고백하자면 살짝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클로드 모네가 살던 집의 창문을 열면 온종일 햇살 아래서 작업에 몰두했을 노년의 화가가 손짓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누가 시켜서라면 하지 못할 덕후 노릇, 중년의 덕질은 밥 대신 빵 대신 생기는 게 있다. 바로 행복한 자신감이다. 나 자신을 위해 몰입하고 빠져들고 새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뛰는 가슴과 열정을 확인했을 때의 기쁨이란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중년, 지금이야말로 덕질하기 딱 좋은 시간 아닐까?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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