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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혼외자식도 친자식" 法은 10년을 주목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A씨가 두 자녀를 상대로 제기한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의 상고심을 기각하자 비난 댓글이 쏟아졌습니다. 대법원이 인공수정으로 출산한 자녀와 혼외관계로 낳은 자녀 모두에 대해서 친생자로 추정해야 한다고 판결한 걸 두고섭니다.

아내와 이혼하며 두 자녀들 상대로 #'친생자관계 없음 인정해달라' 소송

부부는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남편 A씨의 무정자증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자 1993년 타인 정자를 제공받아 인공수정을 통해 첫 번째 자녀를 얻었습니다. 4년 후인 1997년, 둘째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A씨는 자신의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A씨가 진실을 알게 된 건 약 10년 후.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둘째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검사를 받게 됐는데, 그때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3일 A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을 열어 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중앙포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3일 A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을 열어 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중앙포토]

부부는 두 자녀에게 사실을 숨기고 결혼생활을 하다 관계악화로 2013년 이혼 소송을 하게 됩니다. A씨는 이혼 소송과 함께 두 자녀를 상대로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달라’며 친생자관계 부존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자녀들도 그제야 진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두 자녀 모두에 대해 A씨의 친생자로 추정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이 정말로 자녀 두 명을 A씨의 ‘친자식’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일까요?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의 소 vs. 친생 부인의 소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의 소’와 ‘친생부인의 소’입니다. 그 중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의 소는 친생자로 추정할 수조차 없다고 보는 경우에만 제소가 가능합니다. A씨는 ‘애초에 두 자녀는 친생자로 추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걸었습니다.

우리 민법은 혼인 도중 아내가 임신하면 일단 남편의 자식으로 여기는 ‘친생추정의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1958년 민법 제정 당시 친자식이 맞는지 입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태어난 아이에게 법적 안정성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원칙입니다. 1983년 대법원 판례는 친생자 추정의 예외를 ‘부부가 따로 사는 등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을 때’로 좁게 규정했습니다.

‘두 자녀를 우선 A씨의 친생자로 추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이 재판의 쟁점이 된 이유입니다.

1·2심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부적합”

1심은 A씨가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봤습니다. 혼인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우선적으로 친생추정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본 겁니다.

2심은 A씨가 타인의 정자를 사용한 인공수정에 동의해 얻은 첫째 자녀는 친생자로 추정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둘째 자녀는 유전자형이 달라 친생자로 추정되진 않더라도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이 부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A씨가 사실을 알고도 10년이 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입양 관계가 성립됐기 때문입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23일 원심과 같은 취지로 판결했습니다. 첫째 자녀에 대해서는 A씨가 처음부터 인공수정에 동의한 만큼 친생자로 추정해야 하고 친생부인의 소도 제기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첫째 자녀는 진정한 의미의 친자식으로 인정하는 게 맞다는 겁니다.

논란이 되는 혼외자녀에 대해서는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요. 대법원은 “아내가 혼인 중 임신해 출산한 자녀라면 남편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더라도 여전히 남편의 자녀로 추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어 “친생추정 규정은 혈연관계를 기준으로 적용 여부를 달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인공수정을 통해 낳은 첫째 자녀도 A씨와 피로는 이어져 있지 않지만 친생자로 추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A씨가 제기한 소송의 종류가 잘못됐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씨는 여전히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해 둘째 자녀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법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친생부인의 소는 친자식이 아닌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제기해야 합니다. 이 경우 소송의 쟁점은 ‘A씨가 둘째 자녀와 혈연관계가 없단 사실을 언제 알게 됐는지’가 될 겁니다.

달라진 시대 변화 vs. 자녀의 신분 보호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민유숙 대법원의 주장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민 대법관은 “기존 판례가 판단기준으로 삼는 ‘명백한 외관상 사정’의 의미를 현재 상황에 맞춰 확대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유전자 확인 기술 등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친생추정의 예외를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대법원이 지난 5월 22일 연 공개변론에서는 달라진 시대 변화와 자녀의 신분 보호 중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충돌했습니다. A씨 측 변호사는 “기술발달로 진실한 혈연관계 판단이 손쉬워졌는데도 친자관계를 지속시키는 건 불행한 가족관계를 지속하게 해 매우 불합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두 자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친생추정 예외를 확대할 경우 예상되는 파급효과를 고려해야 한다”며 “아이들은 법적 지위가 확정될 때까지 신분이 불안정하게 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대법원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고 자녀의 법적 지위를 신속히 안정시켜 법적 지위의 공백을 방지하고자 하는 친생추정 규정 본래의 입법 취지”를 강조하며 자녀들의 신분 보호가 우선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혈연관계는 금세 알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혈연관계에 있지 않다는 판결 아닐까요.

백희연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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