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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5주년 기념여행에 남편을 초대하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32)

2015년에 출간한 『일본 남자여도 괜찮아』 중 '받을 줄밖에 모르는 남자와의 결혼생활'의 일부를 소개한다.

"내 생일에 뭘 해줄 거야?"라고 물어보면 남편은 자기 생일에는 뭘 해줄 거냐고 되묻는다. 기가 막힌다. 결혼기념일도 마찬가지다. 선물로 뭘 해줄 거냐고 하면 "나한텐 뭘 해줄 건데?"라는 답만 돌아온다.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춤을 춘다. '이 남자 대체 뭐지? 남편 맞아?' 내 아들들이 이런 멋없는 남자를 닮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어느덧 결혼 25주년이다. 지금은 남편이라기보다는 '가족'이다. 서로 속박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는 우리는 항상 따로 논다. 지금까지 둘만의 여행은 신혼여행과 결혼 15주년 기념 여행뿐이다. [사진 pxhere]

어느덧 결혼 25주년이다. 지금은 남편이라기보다는 '가족'이다. 서로 속박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는 우리는 항상 따로 논다. 지금까지 둘만의 여행은 신혼여행과 결혼 15주년 기념 여행뿐이다. [사진 pxhere]

2019년 10월 10일. 결혼 25주년을 맞이했다. 받을 줄밖에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서 사반세기를 같이 산 셈이다. 이 햇수는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세월과 맞먹는다. 지금은 남편이라기보다는 '가족'이다. 가족이란 건강하게 있어 주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받을 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없는 셈 치고 살았다. 그러나 25년을 살고 뒤돌아보니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서로 속박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는 우리는 항상 따로 논다. 지금까지 둘만의 여행은 신혼여행과 결혼 15주년 기념 여행뿐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두 번 다시 이 남자와 여행은 안 한다'라고 결심했었다. 너무나도 취향이 안 맞았다. 두 번째 여행은 이대로 가다가는 '이혼'으로 치달을 것 같아서 억지로 마련한 여행이었다. 무너지려는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다. 결론은 역시 '두 번 다시 가나 봐라'였다.

그런 남편을 결혼 25주년 기념 여행에 초대했다. 좀 이른 여름 휴가철. 시아버지를 모시는 관계로 집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도쿄에서 가까운 아타미(熱海)로 정했다. 나만의 공간으로 숨겨놓고 싶었던 곳, '호텔 그란바하 아타미(グランバッハ熱海)'.

남편과의 여행은 의외로 편안했다. 내가 어른이 된 것인지, 남편이 달라져서 그것에 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두 번 다시 같이 여행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서 '온천 여행 정도는 같이 하고픈 사람'으로 변했다. 오래 입어서 '역시'라고 손이 가는 옷처럼 남편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편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 같아서 싫었는데 그 변함없이 아이 같은 순수함이 이제는 날 편안하게 한다.

가난한 집 3남 2녀 중 장녀를 겁도 없이 선택한 남편. 몰라서 용감했지 싶다. 한국의 큰 사위의 역할을 몰랐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역할을 모르기 때문에 '큰사위다운' 일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안심하고 큰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나를 믿고 묵묵히 그 자리에 있어 준 남편 덕분임을 이제는 안다.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결혼 25주년 기념 여행에 남편을 초대한 것이다. 역시 아이처럼 좋아한다. 문득 누가 남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보다 빨리 저세상으로 가겠다는 사람. 내 나이가 위이기에 내가 먼저 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면서도, 가능한 일이라면, 소망하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나보다 먼저 남편을 보내주고 싶다.

호텔 방에 있는 온천. 온천에 몸을 담구고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피로가 싹 가신다. 대욕장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방 안에 있는 온천도 좋다. [사진 양은심]

호텔 방에 있는 온천. 온천에 몸을 담구고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피로가 싹 가신다. 대욕장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방 안에 있는 온천도 좋다. [사진 양은심]

기념일마다 남편이 무얼 해줄지 기다리는 아내가 있다면 가끔은 먼저 행동해 볼 것을 권한다. 괜히 날짜를 세며 기억하고 있을지, 기념해 줄 것인지 끙끙대지 말자. 기념일을 내 쪽에서 움직여서 적극적으로 축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아주 좋다. 따져보면 결혼기념일은 '시집간 기념일'이 아니다. 남편과 내가 '함께하기로 선언한 날'을 재확인하는 날인 것이다. 여자 쪽만 축하받으려 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도 축하받고 위로받고 싶을 것이다. 인간이니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기념일에 뭐 해줄 거냐는 나의 질문에 "나한테는 뭐 해줄 건데?"라고 되묻던 남편의 사고방식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이 뭘 해줄 것인지 바라기 전에 내가 어떻게 축하해줄까를 생각하는 게 순서였다. 철없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겼었는데 그가 옳았다. 웃음이 난다. 나는 헛똑똑이다.

호텔에서 준비해준 결혼 25주년 기념케이크. 부부가 나누어 먹기에 좋을만한 크기다. [사진 양은심]

호텔에서 준비해준 결혼 25주년 기념케이크. 부부가 나누어 먹기에 좋을만한 크기다. [사진 양은심]

남편은 나와 결혼하기를 잘했다며 아이처럼 웃는다. 왜 나와 결혼했냐는 질문에 "너와 같이 있고 싶으니까"가 전부였던 사람. 유일하게 나에게 프러포즈라는 것을 한 남자. 어떠한 인연으로 한국인인 나와 일본인인 그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을까. 25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며, 잘 견뎌냈다고, 잘 살아냈다고 우리 부부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생활이 이어지도록 끈이 되어 준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일본 속담에 '子は鎹(코와 카스가이/자식은 꺽쇠)'라는 말이 있다. 자식의 존재가 부부관계를 유지하게 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애초에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 부부를 만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진심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담 하나.
어느 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부부도 '그란바하 아타미' 예약했어"
"왜?"
"자기 부부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도 가고 싶다고 해서"
환하게 웃고 있을 친구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내들이여, 가끔은 남편을 초대해 보자.

한일자막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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