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평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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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프란시스 베이컨은 평화가 좋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평화시에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땅에 묻지만, 전쟁엔 아버지들이 자식들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는 그러나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깃발을 흔들며 축하하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어도 평화는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사르트르가『전쟁의 종말』이라는 글에 남긴 이 말을 우리만큼 실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이 땅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환호하는 사람은 없었다.
밖으로는 호전적인 북한의 위협, 안으로는 그를 빌미로 삼은 강권정치와 자유, 인권의 유보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사회불안과 사회적 낭비를 강요받아야 했는가. 그런 불안의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 옆을 떠나지 않고 있다.
바로 지난해 가을 우리는 올림픽의 팡파르 속에서 세계의 젊은이들이 손에 손잡고『어디서나, 언제나, 하늘 향해 팔 벌려 고요한 아침 밝혀 주는 평화 누리자』고 노래했지만 그 평화의 제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어디서, 언제 총성이 울릴지 모르는 불안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총성이 없는 평화에만 만족할 수 없다. 아직도 세계의 도처에선 아름다운 평화의 커튼 뒤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병고와 가난과 외로움에서 신음하고 있다. 인간의 양심과 양식이 어이없게 단죄되는 경우도 수없이 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전쟁보다 더 전율 스러운 상황이다.
『평화는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은 덕성이며 마음의 한 상태이고 박애의 마음가짐이고 신념이며 정의다』
스피노자는 평화를 이처럼 우주의 넓이만큼이나 깊고 넓게 생각했다. 평화는 삶의 조건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인류화합과 세계평화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뽑아 30만 달러의 상금을 주는 서울평화상의 제정을 발표했다.
노벨 평화상도 때로는 구설수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 상의 신인과 권위를 어떻게 유지할 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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