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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성공의 함정, 강성노조…한국 히든챔피언 탄생 막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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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히든 챔피언의 비밀 ⑤·끝

‘히든챔피언 특별대담’에 참여한 전문가들. 왼쪽부터 이용석(스탠포드대), 김원준(KAIST·과총), 윤혜진(노스웨스턴대), 마누엘 트라덴버그(텔아비브대), 스콧 스턴(MIT), 제프 퍼먼(보스턴대), 알렉스 코드(페루 교황청가톨릭대) 교수. 이밖에 김인송 MIT 교수가 함께했다. 문희철 기자

‘히든챔피언 특별대담’에 참여한 전문가들. 왼쪽부터 이용석(스탠포드대), 김원준(KAIST·과총), 윤혜진(노스웨스턴대), 마누엘 트라덴버그(텔아비브대), 스콧 스턴(MIT), 제프 퍼먼(보스턴대), 알렉스 코드(페루 교황청가톨릭대) 교수. 이밖에 김인송 MIT 교수가 함께했다.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가 창간 54주년을 맞아 독일·스웨덴·이스라엘에서 발견한 소재·부품·장비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강소기업)은 3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 분야에서 장시간 기술력을 축적하고, 꾸준한 혁신으로 경쟁기업과 격차를 벌리며, 이해관계자가 화합·타협했다는 점이다.

국내외 기업혁신 전문가 대담 #한국 우위 산업부터 디지털변혁 #디지털 차·철강·조선 키워야 #부품소재 모두 국산화는 위험

독일(1307개)과 비교하면 한국(23개) 히든챔피언은 턱없이 적다.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히든챔피언을 육성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미래전략연구센터의 도움으로 기업혁신·경영전략 분야 전문가 8인을 한 자리에서 모아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 방안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빠른 성공의 함정’에 빠진 한국=이들은 일단 경제규모나 성장속도 대비 한국 히든챔피언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를 파헤쳤다. ‘빠른 성공의 함정(fast success trap)’이 원인이었다. 김원준 과총 과학기술혁신정책위원장은 “한국 제조업은 빠른 추격자(fast-follower) 전략으로 선도자(first-mover) 그룹에 다가서는 과정에서 거대한 성공을 경험했다”며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달라진 환경에서도 과거의 과도한 확신과 과거지향적 합리화에 빠져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의 성공은 히든챔피언 탄생을 저해한다. 빠른 추격자 전략은 혁신 비용·기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저렴하고 품질 좋은 국외 소재·부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굳이 핵심 기반 기술을 개발할 유인이 적다는 뜻이다. 또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융합이나 인공지능(AI) 등 최신 혁신을 먼저 도입할 이유도 희미해진다. 스콧 스턴 미국 MIT 경영대학원 교수가 “과거 한국 제조업의 ‘빠른 성공’이 이제는 혁신의 가치를 내재화하는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언급한 배경이다.

마누엘 트라덴버그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히든챔피언 육성의 키워드로 디지털변혁(digital transform)을 꼽았다. 그는 “한국이 우위를 점한 반도체·자동차·철강·조선·화학 산업에서 시작하라”며 “해당 분야 소재·부품 기업이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응용해 디지털차·디지털철강·디지털조선 산업을 창출한다면, 히든챔피언을 육성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경직된 노동시장이 발목=한국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용석 미국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한국학프로그램 부소장은 “한국에서 AI와 같은 혁신을 도입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가 이직하기 어렵고, 일부 강성 노동조합이 일자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혁신에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은 기술 인재 육성과 밀접하다. 스웨덴 금속베어링 기업 SKF에서 1907년 자동조심베어링을 개발한 것은 보수담당 기술자 스벤 빙크스트였다. 기술 인력 육성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외부에서 인재를 수혈하거나, 기존 인력을 재학습·재교육하는 방법이다.

폐쇄적인 한국 특유의 노동시장에선 두 가지 방법 모두 도입이 어렵다. 전문가는 한국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7년차·중간관리자 이상이 되면 소위 ‘몸이 무거워진다’는 것도 문제다. 일부 노동조합은 근로자 재교육·재배치까지 노사합의 대상으로 삼아 신기술 도입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 이용석 부소장의 설명이다.

김원준 위원장은 “히든챔피언 육성의 전제는 사내·외 디지털변혁을 전담하는 ‘변혁특수팀’”이라며 “노동 시장 경직은 혁신을 전면에서 이끌 변혁특수팀 구성을 막아 히든챔피언 육성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맹탕 R&D 투자 달라져야=‘소재·부품 강국’ 독일의 플라스틱 소재기업 이구스(igus) 사례에서 확인한 것처럼 연구개발(R&D)과 히든챔피언은 불가분의 관계다. 물론 한국 정부·기업 R&D 투자 금액(80조원)은 세계 5위 수준이다. 문제는 투자 대비 효율성이다. 제프 퍼먼 미국 보스턴대 경영대학 전략·혁신학과 교수는 “예컨대 조지아공과대학은 기술 개발에 특화했고, 텍사스A&M대학은 농업에 특화한다. 또 다른 대학은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기업이 제시한 기술을 최우선적으로 연구한다”며 “한국도 분야별 히든챔피언 기술 특화대학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대·중소 기업간 격차는 논쟁거리였다. 이스라엘 국적의 마누엘 교수는 “이스라엘의 경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은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이 대규모 R&D를 투자하면서 고객과 접점을 확보해 제품을 판매한다면,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혁신을 유도한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명확한 역할 분리는 히든챔피언의 조건인 ‘축적의 시간’을 제공한다. 축적의 시간은 혁신을 유도하고, 혁신 기업은 자본 투자를 이끌어 내며 히든챔피언으로 성장하는 선순환이 벌어진다는 설명이다. 윤혜진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조직대학원 교수는 “기존 산업 구조의 가치를 확장하고 디지털번혁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중소기업을 히든챔피언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부 주도 깜깜이 투자 위험=소재·부품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는 대통령 직속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를 가동했다.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일부 분야를 국산화하는 정책·전략은 필요하다. 하지만 국산화라는 구호에 매몰되면 오히려 히든챔피언 육성이 어려울 수 있다. 김인송 MIT 정치학과 교수는 “삼성전자가 일본산 폴리이미드를 사용해서 만든 반도체를 일본산 TV에 넣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비교우위’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런 국제적 분업을 중단하면 전체적 생산비용이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전문성을 갖춘 미래의 히든챔피언이 고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성급한 국산화는 제품·기술 혁신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알렉스 코드 페루 교황청가톨릭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부품·소재를 모두 국산화하는 행위는 글로벌 가치사슬의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라며 “히든챔피언 육성 기회도 덩달아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별취재팀=최준호·이동현·김영주·박민제·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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