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당선 박세회씨 "기사와 다르게 소설 쓰기가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제20회 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박세회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제20회 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박세회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제20회 중앙신인문학상의 주인공들이 선정됐다. 단편소설 부문은 박세회씨의 '부자를 체험하는 비용'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단편소설 1018편의 응모작을 대상으로 예·본심을 치른 결과다. 1981년 서울 출생인 박세회씨는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고. 허프포스트 코리아 기자로 재직 중이다. 박세회씨의 당선 소감과 심사평, 당선작을 소개한다.

관련기사

소설 당선 소감

 처음 소설을 쓴 건 올해 초 문화센터 소설 쓰기반에 등록하면서다. 회사 지원으로 소설 수업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스토리텔링 저널리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로 편집장을 설득했다. 엉뚱한 이유를 별말 않고 받아준 김도훈 편집장이 고맙다. 그때부터 소설 쓰기가 일상의 낙이 됐다.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을 썼다. 소설 쓰는 게 그렇게나 즐거울 줄이야. 가끔은 새벽이 밝도록 무리를 하기도 했다.
 기사를 쓰는 것과는 달랐다. 기사는 사실을 찾아 헤매지만, 진실에 가 닿기 힘들다. 아주 가끔은 이해관계에 얽혀 거짓말을 하는 취재원을 만나 허탕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상상을 엮어 표상화한 세계 속에서 나름의 진실을 어떻게든 더듬어 볼 수 있다. 내가 만든 등장인물이라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요새 말로 ‘방구석 여포’가 될 수 있었다.
 소설을 하나 완성하면 아내와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19년,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유복했을 한해의 절반을 그렇게 보냈다. 6편의 짧은 소설을 쓴 후, 마지막 과제가 단편 쓰기였다. 그때 쓴 소설이 ‘부자를 체험하는 비용’이다. 이 작품을 읽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김현영 소설가와 소설 쓰기반 친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소설을 쓰면서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어렴풋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거칠게 언어로 옮겨 보자면, ‘단순한 표상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과 엮여 거대하게 팽창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소설을 통해 초보 작가의 미완의 소설관이 조금이나마 전해지기를 바란다. 글을 쓸 때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유일한 독자이자 최고의 편집자인 나의 아내에게 감사를 전한다. 일찍이 문학의 풍요를 알려준 대학 은사 김진영 교수, 내 인생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선물해 준 대학 은사 최건영 교수에게 감사를 전한다.

소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질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였고 성향 또한 다양했다. 투고된 편수도 적지 않아 전에 없던 설렘과 기대를 가지고 심사에 임했다.
 '47번 국도의 추월자들'은 오늘날의 생활인, 그들의 궁핍한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디테일이 살아 있고 무리 없는 전개가 미덕이다. 반면 세세한 상황의 나열 이외에 이 작품만의 개성과 새로운 무엇인가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와리가리(Switching Punch, 2019)'는 레트로 게임에 관련된 특이한 이야기다.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과거의 한물간 게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을 만한 소수자들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면서 흥미로운 독서가 가능한 한 지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런 작품이 가지고 있는 ‘소수성’이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능하기보다는 거칠고 전망 없는 전개를 낳은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자아냈다.
 '흑백의 그라데이션'은 진지하고 단편소설답게 꽉 짜인 작품이었다. 이민자의 삶과 가치관의 충돌, 낙태 같은 도덕적인 문제가 일상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안정된 문장으로 보여주면서 마지막 부분에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언술로 가볍지 않은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예심을 통과한 십여 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우월하고 품이 넓은 풍모도 느껴졌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모두 극복할 수 없는, ‘이미 어디서 본 듯한 스타일’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당선작인 '부자를 체험하는 비용'은 한국 문학에서 쉽게 보기 힘든 낯선, 입시와 소비사회, 계급성 등의 현실 문제에 대한 날 선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허언증’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주인공의 불필요한 허위, 위악성은 오늘날의 ‘상류인’들이 가진 이중성의 상징으로 읽힌다. 빠르고 감각적인 서술과 상황 전개도 나무랄 데 없다. 이런 작품은 한 작가의 기량이 고도로 성숙했을 때만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 힘을 보탰다. 당선을 축하하며 안타깝게 기회를 미루게 된 분들의 정진을 빈다.

※소설 본심 진출작 (13편)

권여름 '흑백의 그라데이션'
김도우 '와리가리'
김소진 '문희'
도수영 '47번 국도의 추월자들'
박세회 '부자를 체험하는 비용'
박윤진 '그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
박하빈 '세일러문과 북극곰을 지키는 후원자들의 지하철 여행'
신종원 '간사이식 칸타타'
윤나리 '밖이 안을 보는 방식'
전소연 '피씨한 나라의 쌔라'
정선아 '프로세싱'
정해연 '주말의 속도'
최추영 '피어 팩터'

본심 심사위원=권여선·성석제(대표집필 성석제)
예심 심사위원=김도연·백지은·심진경·이신조·전성태

소설 당선작

부자를 체험하는 비용

- 이번 달에 컷더등심 인터뷰 못 나갈 것 같은데요.
편집장은 내 말을 듣고도 책상 위에 놓인 교열용 대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컷더등심은 팔로워가 12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로, 어떤 매체에도 본명과 얼굴을 제대로 공개한 적이 없었다. 컷더등심의 섭외가 예정됐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편집부 전체가 기대에 들떴던 이유다. 그 어렵다는 사람을 섭외한 게 나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역시 섭외는 이유진’이라며 가장 신나하던 편집장에게 컷더등심의 단독인터뷰를 내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 왜에? 컷더등심님께서 돈을 달라고 하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편집장이 말을 눌렀다. 대답을 찾는 사이 빨간 수성펜으로 대지에 교열 부호를 그려 넣고 있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사무실 한구석에 기역자로 담을 친 편집장 데스크의 통로를 막고 서 있던 나는 슬쩍 발을 빼며 칸막이 뒤에 기대 숨었다. 편집장이 너무 화가 나면 낯짝을 안 쳐다본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생존 본능을 살려 귀여운 말투로 태세를 전환했다. 나도 화가 난다. 나는 당신의 화난 후배지만, 귀엽다. 나는 며칠 전 당신에게 회오리 소맥을 말아주며 스마트폰 플래시로 재롱을 떨었던 12년 차 신입사원 이유진이다. 이런 심정을 목소리에 담았다.
- 저도 잘 모르겠어요. 걔가 뭐, 내가 프로페셔널 하지 않다나,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하, 참 기가 막혀서.
편집장이 눈을 들어 나를 봤다. 한국 라이선스 패션 잡지 편집장 2세대의 마지막 기수. 사실상 봐그코리아를 만들고 봐그코리아를 키운 봐그체의 창시자가 나를 지긋하게 노려봤다. 편집장 연차만 21년. 신디더퍼키의 창간 멤버는 아직 매호 특종을 노린다.
- 그럼 프로답게 해결해보면 되겠다. 그치?

생각해보면 지난 기획 회의 때 컷더등심 인터뷰 얘기를 꺼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전날 새벽까지 교정용 대지를 돌리고 최종 컬러를 수정한 후 느지막이 출근한 마감 날 오후였다. 그달에는 담당 꼭지가 5개라 특히 정신이 없었다. 전역 후 복귀앨범을 발매한 빈지노와 인스타그램 뷰티 인플루언서 안지선을 인터뷰했고, 여름 갯장어의 맛을 다룬 취재 기사를 꾸렸다. 거기에 경리단의 뉴트로풍 식당 소개와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에 대한 프리뷰까지 직접 쓰고 편집하다 보니, 화가 났다. 와중에 팀장은 ‘점심 먹고 2시에 피처 팀 기획 회의합니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달은 9월이에요. 유진이는 인플루언서 특집 센 거로 하나 잡아주고’라는 단체 문자를 보냈다. 최근에는 어쭙잖은 연예인보다는 인플루언서 인터뷰가 독자 반응도 좋았고 조회 수도 더 잘 나왔다. 디지털이 판을 망쳐놓았다고 할까? 예전의 잡지는 퀄리티와 때깔로 승부를 봤다. 톱 배우를 커버에 앉힐 수 있느냐 없느냐, 럭셔리 브랜드가 얼마나 협찬을 잘해주느냐에 따라 매체의 파워가 갈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숫자 싸움이다. 종이 잡지는 광고주 진상용이고, 결국 웹에 풀린 기사의 조회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바이럴을 통해 집계된 숫자에 따라 기사의 성적이 판가름났다. 지난 3월에는 책에 실린 모든 기사 중 모던 한식 인스타그래머 면식마님의 첫 단독 인터뷰가 봐그코리아 사이트 최고 조회 수를 기록했다. 사고치고 2년 만에 돌아온 천예솔 인터뷰의 두 배를 넘겼다.
봐그는 마감 날 기획안을 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야 편집장이 빨리 기획안을 취합해 본부장에게 보고를 올리고 마감 다음 날 하루를 푹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획안을 내는 날은 꼭 날씨가 좋다. 왜? 기획안을 내는 날 날씨가 좋지 않았던 건 기억에 남지 않으니까. 날씨도 좋고 파티션도 막 파릇파릇 초록색이다. 파티션이 초록색이라 울컥했던 게 기억난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인플루언서 해시태그를 타고 돌아다녔다. 인스타 라이브를 모니터링하는 틱톡 라이브의 조회 수를 살피고, 사용자 반응도를 분석하는 빅풋 데이터에 들어가 지난 한 달간 가장 급격하게 떠오르는 계정을 찾았다. 이게 다 내 돈을 주고 쓰는 툴이었다. 잡지사 기자가 자기 돈을 주고 바이럴 스타를 찾기 위한 툴을 사서 쓴다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툴을 써서 찾기도 힘들다. 핫하고, 영하면서, 지금껏 다른 잡지에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는 익스클루시브한 스타는 오래전에 씨가 말랐다. 막내들이 특집에 들어갈 중급 스타 두 명을 섭외 중이었다. 내게 떨어진 미션은 면식마님 급의 모멘텀 넘치는 대장주 후보감을 찾아내는 거였다. 피로가 쌓이고 파티션은 여전히 초록색이고 좋은 날은 저물고, 그러다 결국 울컥해서 기획안 마지막에 컷더등심 인터뷰를 적어내고 말았다. 팔로워 17만의 라이프스타일 구루 컷더등심의 첫 단독 인터뷰. 르네 레드제피가 인정한 그녀의 실제 라이프스타일을 살핀다. 정말로 컷더등심을 섭외해서 꼭 인터뷰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 이름을 적어 내면 기획안을 다시 써오라는 소리는 안 들을 것이 분명해서다. 어설픈 목표를 내서 목표를 수정하라는 잔소리를 듣느니 이루지 못할 목표를 내고 잠시라도 안위를 누리리라.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해도 늦지 않는다. 그게 내 기획안 작성의 철칙이다. 예전에 지나치게 피곤할 때는 칩거 중인 심은하의 인터뷰를 기획안에 적어 낸 적도 있다. 그때는 실패를 가장하느라 치밀한 연기가 필요했다.
- 와 대박.
팀 카톡방에 회의록을 올리자마자 후배 한 명이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다들 컷더등심의 인터뷰가 잡힐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워했다. 특히 문화 쪽에 빠삭한 피처팀 후배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 이거 사전 섭외하신 거예요?
눈치 없는 막내가 단체 창에 물었다. 얘는 정말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는 거니?
- 얘기 넣어뒀지. 답장 한번 받았고.
일단은 선의의 거짓말로 카톡방에 있는 편집장을 안심시켰다. 편집장에게도 마감의 탈출구가 필요하다. 컷더등심이 한국 최고의 패션잡지 봐그에서도 마음대로 섭외 못 할 존재가 된 데는 맥락이 있다. 처음 그녀가 미식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건 엄청난 후광 덕이었다. 한남동 무가리츠의 정지녕 셰프가 자기 인스타에 ‘엘 불리의 페란 아드리아가 팔로우하고 있는 한국 여성이 있다’라며 페란 아드리아의 팔로우 리스트를 캡처한 사진을 올렸다. 전 세계 미식계의 슈퍼스타들로 채워진 페란 아드리아의 팔로우 리스트에 컷더등심의 아이디가 올라 있었다. 이 글을 본 망원동 키네티크의 오너 셰프가 ‘어머나, 일레븐 매디슨 파크의 다니엘 흄도 이 여자를 팔로우하네요’라며 다니엘 흄의 팔로우 리스트 사진을 올렸다. 미슐랭 가이드가 처음 한국에 들어오던 시기와 맞물려 관심이 폭증했다. 혹시 미슐랭 측에서 한국 레스토랑 후보를 리스트업하라고 보낸 코디네이터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녀의 계정에는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그랜트 애커츠, 르네 레드제피와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전설의 셰프들과 친구처럼 어깨에 손을 두르는 여자. 스페인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엘 불리의 페란 아드리아가 팔로우하고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1위에 빛나는 일레븐 매디슨 파크의 다니엘 흄과 친구 먹은 이 여자는 대체 누군가. 좁디좁은 미식계에 번진 얕은 관심이었지만, 컷더등심은 인기 셰프들의 계정에 거듭 언급되며 팔로워를 늘려갔다.
이후 컷더등심은 레스토랑 하나를 살리고 죽이며 이름을 키웠다. 살리고 죽였다는 건 허튼 수사가 아니다. 그녀가 사진을 세 번 올리고 진정한 스페인의 맛이라며 극찬한 이태원의 테리노는 두 달 치 예약이 밀릴 만큼 장사가 번창했다. 테리노는 설익은 밥에 튜브에 든 갑오징어 먹물을 버무리고 성게 알을 올린 후 송로 버섯 편을 뿌려 3만8000원을 받았다. 사실 끔찍한 혼종 사기꾼에 불과했지만, 컷더등심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지금은 분점 네 개를 운영 중이다. 한편 청담동의 스시 쿠로는 그녀의 포스팅 하나 때문에 장사를 접었다. 컷더등심이 쿠로의 마지막 코스인 한입 카니동 사진을 올리며 ‘혹시 햅반?’이라는 코멘트를 달아서다. 쿠로는 햅반이 아니라고 최선을 다해 해명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르네 레드제피의 친구가 햅반 같다고 했으니, 햅반을 쓴 것은 아니라도 햅반 같은 밥을 쓰는 집이 됐다. 다른 인스타그래머들과는 달리 돈 받고 올리는 포스팅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 역시 인기의 요인이었다. 그녀는 패션 제품 사진을 올릴 때면 가끔 ‘돈은많아서돈을받진않아요’라는 해시태그를 달곤 했다.
- 나 이분 완전 좋아하잖아. 역시 섭외는 우리 유진이다 정말. 근데 컷더등심 연락은 확실히 된 거지? 나 이거 본부장한테 말해도 되는 거지?
편집장은 마치 원빈과 이나영의 결혼식 단독 취재권이라도 받아온 것처럼 흥분했다. 사실 나는 컷더등심이 섭외가 된다고 해도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녀의 팔로워가 1만 명도 채 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도쿄에서 사온 카고미 솥에 히토메보레 쌀로 밥을 지어봤어요’라는 포스팅에 ‘시린이 잘 지내는구나’라는 댓글이 달렸다. 컷더등심이라는 해괴한 닉네임까지 써가며 존재를 감춘 사람의 실세계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댓글을 단 사람은 남자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확인해보니 뉴월드 그룹의 장용은 회장이었다. 장용은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구나, 라며 놀란 것도 잠시였다. ‘시린’이라는 흔치 않은 이름이 머리를 때렸다. 그러고 보니 셰프들과 찍은 사진에서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윤곽이 낯이 익다 싶었다. 십수 년 전, 기억의 외야에서 던진 공이 뒤늦게 홈플레이트에 다다랐다. 혹시 연세대학교 불문과 03학번 서시린? 그녀의 포스팅을 확인하며 나의 의혹은 조금씩 짙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사진 한 장에서도 돈 냄새가 진동하게 하는 게 딱 서시린 스타일이었다. 편집장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이참에 나의 확신을 시험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살짝 들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봐그코리아의 이유진 에디터입니다’로 시작하는 디엠은 정교하고 정중했다. 그녀의 실체가 연세대학교 불문과 03학번 서시린일 거라고 확신하는 나의 마음이 묻어나오지 않도록 단어와 토씨를 고르고 또 골랐다. ‘저희 편집부는 2019년 9월호 인플루언서 특집을 맞아 컷더등심님의 인터뷰를 진행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꺼냈고, ‘가장 앞 지면에 배치되는 기획으로 스타일리스트 우기 씨와 패션 포토그래퍼 김정묵 실장에게 가섭외를 걸어 둔 상황입니다’라는 말로 미끼를 던졌다. 우기와 정묵 실장은 둘 다 소위 준(準)셀럽이라, 이들과의 작업은 인맥 특급 열차나 다름없었다. ‘얼굴을 전부 드러내는 게 꺼려지시면, 모 영화평론가처럼 일부를 가면으로 가리고 촬영하는 방법도 있으니 아무쪼록 편하게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전화번호를 덧붙이고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여러 번을 다시 읽었다.

디엠으로 보낸 편지의 답장은 휴대전화 메시지로 왔다.
- 안녕하세요. 컷더등심이에요. 봐그코리아에서 연락을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아이폰 메시지 창에 상대방이 텍스트를 입력하고 있다는 표시가 떴다. 잠시 후 메시지가 왔다.
- 그런데 제가 8월 10일이 지나서 한국에 들어가요. 9월호에 가능한 일정인지 모르겠네요.
매호의 최종 마감은 16일이다. 빡빡하지만 가능했고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 다행이네요. 저희 집에서 찍으시면 좋겠어요.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답장이 왔다.
- 얼굴 노출은 좀 망설여지지만, 봐그라면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듭니다. 가능하다면 12일이 좋겠어요.
컷더등심의 집이라면 오히려 독자들의 훔쳐보는 심리를 자극할 수 있어 반길 일이었다. 문자가 멈춘 것을 최종으로 확인하는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그날 이후 컷더등심의 인스타그램을 습관적으로 확인했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분 단위로 휴대전화를 켜고 컷더등심의 페이지에 들어가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끌어 내렸다. 동그란 방사형 무늬의 원이 빙글빙글 돌다가 사라졌다. 그 아래로 그녀가 최근에 올린 포스트가 보였다. 지금은 생트로페, 이틀 전에는 칸느, 그 전에는 니스였다. 구글맵으로 니스를 찾았다. 니스 옆에 칸느가 칸느 옆에 생트로페가 있었다. 아마도 내일은 마르세유의 사진이 올라오겠지, 프랑스 남부를 돌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컷더등심이 헬리콥터의 창문 바깥으로 찍은 생트로페의 하늘은 서울의 하늘 두 배쯤 높아 보였다. 사진 아래 ‘생트로페는 헬리콥터를 타고 가는 게 가장 편하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헬리콥터는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네요’라는 글이 있었다.
나와 대학 동기인 서시린은 문과대 전체에서 12명을 정원 외로 뽑는 재외국민 특별전형, 그중에서도 ‘12년 특례’로 입학했다. ‘12년 특례’는 당시 강남 학원가에서도 귀족 전형이라 불렸다. ‘외교관이나 공무원 또는 국외 사업체를 운영하는 부모가 반드시 국외에서 체류해야 하는 등의 사정으로 12년 초중등 전 교육과정을 국외에서 이수한 학생’에게만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시린의 입학 사례 때문에 우리 동기들은 특례 입학 전형이 뭔지 샅샅이 찾아 알고 있었다. 대박, 수능 최저도 없어? 수시보다 더 좋네, 따위의 말들이 오고 갔다. 시린의 부모는 외교관이나 공무원은 아니었지만, 돈이 많았고 준비성이 철저했다. 시린의 말에 따르면 시린의 부모는 “한국 같은 경쟁사회에서 살아서는 아이가 망가진다”며 “경쟁을 하지 않고 압도적인 스펙을 쌓아야 교양과 지성에 맞는 성정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부모는 여섯 살의 시린을 데리고 캐나다로 건너갔다. 보광동과 한남동에 상가 빌딩 각 한 채씩을 가지고 있던 시린의 아버지는 투자 이민을 신청한 후 캐나다에 일식집을 차렸다. 현지에 거주하며 사업을 했다는 증빙 서류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었다.
언젠가 시린이 “일식집이라고는 하지만 슈퍼마켓에서 파는 냉동 우동을 떼다 팔았다”고 말했던 거로 미루어 봤을 때 장사를 하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문을 닫는 날이 여는 날보다 많았”고 결국 시린의 부모님은 “나중에는 아예 매니저를 따로 두고 한국에서 친구들과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시린은 방학 때면 한국을 오가며 한국인 친구를 사귀고 한국의 분위기를 익혔다. 학기 중에는 착실하게 현지 학교에 다니며 한국어를 쓰는 입주 가정교사에게 따로 한국어 과외를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치를 한국어 시험을 준비했고, 입학 자소서에 쓰기 위해 미국 수능이라는 SAT도 최고 등급을 받아뒀다.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학에 일단 들어가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성격을 버린다”는 게 시린 아빠의 지론이었다.
당시 학교에는 재특전형으로 온 시린의 유복함을 부러워하면서도 따돌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국의 입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동기들은 시린에게 ‘너와는 다르다’는 알량한 자의식을 뿜어냈고 그건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학기 초에는 모이기만 하면 수능 점수를 꺼내서 서로 비교하곤 했는데, 그녀는 그게 자신에게 에둘러 적대감을 표하는 방식임을 알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번은 짓궂은 선배 하나가 술에 취해 “시린이네 아빠가 기숙사 앞에 있는 테니스 코트 만들어줬다며?”라고 허튼소리를 던진 적이 있다. ‘안산 자락에 있는 테니스 코트’, ‘학생회관 앞 잔디밭’, ‘강당에 있는 초대형 프로젝션 시스템’이 특례입학생들을 놀릴 때 꺼내 드는 상투적인 표현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놀림당한 사람이 정색이라도 하면 ‘장난인데 왜 그래’라고 발뺌할 태세가 되어 있는 그 선배의 비열함이 내게는 보였다. 보다 못한 나는, 역시 술기운을 빌려 “너희들이 앉는 의자, 너희들이 보는 나무가 다 시린이 아빠가 사고 심은 것. 감사하다고 하지는 못할망정”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시린은 내 말에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한 아이가 내게 “유진아 시린이한테 너무 심한 거 아냐?”라며 정색을 했다.
인생에서 어떤 순간은 세세한 구석까지 절대 잊히지 않는데, 시린과 과방에서 짜장면을 처음 먹었던 그 날이 내겐 그랬다. 과방은 학교에서 지은 지 가장 오래된 건물 반지하에 있었다. 바깥쪽 벽에 난 한 자 조금 넘는 크기의 작은 창으로 한낮에만 해가 들었는데, 선배들은 해가 들면 먼지가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 더럽다며 커튼을 쳤다. 시린과 나 그리고 몇몇은 지금이라면 당장 마스크라도 써야 할 공간에서 수천 명의 엉덩이가 비비고 지나간 소파에 앉아 3500원짜리 짜장면을 비볐다. 우리 옆에는 자판기 커피가 쏟아진 채로 말라 먼지가 까맣게 덕지덕지 눌어붙은 대학 프랑스어 입문 교재가 시체 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와 이게 짜장면이구나.
시린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시린이 뱉은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 짜장면을 처음 먹어?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응, 드라마에서만 봤어.
- 어쩌다 짜장면을 스무 살에 처음 먹게 됐을까?
옆에 있던 한 선배가 느끼한 목소리로 물었다. 굵은 목 아래 엄지손톱만 한 점이 있는 남자 선배였다. 시린이 말했다.
- 엄마가 짜장면을 싫어했거든요. 돼지기름에 설탕 덩어리라나?

컷더등심이 가르쳐준 주소는 경리단 뒤쪽 남산자락이었다. 주소를 찍은 택시 기사는 차가 너무 막혀서 이태원 뒷길로 넘어 돌아가야 한다며 짜증을 냈다. 녹사평역에 못미처서 주택가로 들어선 택시는 십수 번의 크고 작은 커브를 돌며 언덕을 올랐다. 빨간 벽돌, 주황 벽돌로 지은 다가구 주택을 지나자 화강암과 대리석 외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1층에 테라스와 경비실이 딸린 거대한 다세대 주택들이 열을 지어 있었다. 프린스, 노블, 밀레니엄, 캐슬 등 세상의 좋은 단어를 골라 뿌려놓고 개중에 무심하게 뽑아 단 듯한 푯말들이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니 초록 바탕에 황금색 양각으로 새겨 넣은 ‘트라이스타 빌라트’의 문패가 있었다. 문자를 보냈다.
-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벨 누를게요.
잠금장치가 된 현관 안쪽에 알루미늄 틀로 짠 관리실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경비원이 본 척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2호를 호출하니 잠시 후 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1층에는 101호도 102호도 아닌 1호와 2호가 있었고, 2호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유백색 석재가 깔린 현관에 들어서자, 중문 너머로 작가를 알 수 없는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 속에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금발의 아기들이 원근감을 무시한 채 늘어서서 자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중문의 바로 앞에는 양옆으로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고, 천장은 사람 하나를 내 머리 위에 세울 수 있을 만큼 높았다. 나는 시린을 한눈에 알아봤지만, 시린이 나를 알아봤는지를 가늠하진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낌새를 챌 기회를 잃었다.
- 들어오세요. 김유진 에디터님이시죠?
쪽 찐 머리를 고정하고 있는 검정 헤어핀에 작은 에이치(‘H’) 문양이 도드라졌다. 살짝 쳐진 눈자위와 칠흑처럼 검어 서늘한 눈동자의 느낌을 오뚝한 콧날 아래 작은 콧방울이 강조하고 있었다. 옅게 빛나는 실크 소재의 민소매 회색 원피스는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처럼-그러나 내가 절대 편하게 사지는 못할 옷처럼 보였다.
- 아, 이유진입니다. 촬영 팀은 지금 오고 있어요.
- 어머 죄송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인터뷰를 먼저 하나요?
- 사진을 먼저 찍어야 인터뷰 스케치를 할 때 더 예쁘게 나오지 않을까요?
대답하면서도 눈이 돌아갔다. 시린은 나를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 15년이 지났으니. 그러나 이미 우리의 관계는 잠시 가슴 한켠으로 밀려났다. 길게 난 복도의 오른쪽 끝은 거실에 닿았고, 도로 쪽으로 난 거실의 전창 너머 테라스에는 여덟 명쯤 앉을 수 있는 피크닉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다. 거실의 중앙에는 바우하우스 디자인 도록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히네크 고트발트의 데이베드가 실물로 존재했다. 뼈대를 이루는 은색 파이프에 군데군데 핀 검버섯과 미백색 가죽에 세월이 새겨놓은 주름이 그 아름다움에 권위를 더했다. 1930년대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그 소파가 고요하게 남산 맨션의 거실을 점령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잠시 실감이 사라졌다. 거실 뒤편으로는 허리 높이까지 오는 가벽으로 분리된 반쯤 열린 형태의 다이닝 룸이, 그 건너에는 배꼽 높이까지 올라오는 아일랜드 테이블로 분리된 부엌이 있었다. 바닥에서 솟아난 것처럼 굳건한 차이틀로스의 확장형 탁자가 다이닝룸의 중심을 차지했고 탁자 주위로는 지나치다 싶게 아름다운 에메랄드 색상의 반원형 팔걸이의자 한 조가 둘러져 있었다. 토넷 사의 20세기 초반 디자인으로 보였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확실한 건 그 의자 4개의 색상과 상태를 맞춰 한곳에 모으려면 돈 많고 한가한 사람이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리라는 사실이다.
- 침실들과 옷방은 복도 반대편에 있어요.
나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는 걸 깨닫자 잠시 부끄러움이 차올라 기도를 반쯤 막았다. 어느새 뒤따라온 촬영팀이 도착해 장비를 펼치고 있었다. 스타일리스트 우기의 어시스턴트가 거대한 이민 가방을 들고 나타나 옷방을 찾았다. 촬영 콘셉트는 미리 ‘유한마담의 신도시 생활’로 잡아둔 터였다. 정묵 실장이 나를 불렀다.
- 여기가 좋겠네. 우기가 오늘 로로피아나 로브를 색깔별로 잔뜩 가지고 왔다니까 그거 입고 여기서 찍으면 되겠다.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살피던 정묵 실장이 나를 잡아끌며 말했다.
- 아니, 근데 정말 컷더등심님 완전 모델이세요. 여기 집도 그렇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정묵 실장은 원래 촬영장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칭찬을 남발하곤 했지만, 이번만은 빈말이 아니었다. 왜, 시린이는 어떤 인생을 살아서 여기까지 왔을까? 정묵 실장이 나를 끌고 간 복도 건너편 침실의 테라스는 남산 쪽으로 나 있었다. 출입구 쪽에서 1층인 집은 뒤편에서 보면 3층의 높이였다. 두층 아래 필로티에는 주차된 차들이 보였고 주차장은 작은 뜰을 사이에 두고 산자락과 이어졌다. 정묵 실장을 침실에 딸린 파우더룸을 가리키며 말했다.
- 메인 컷은 여기네. 때마침 빛도 좋아서 조명을 많이 칠 필요도 없겠어. 여기에 새틴 로브 입고 샴페인 잔 들고 있으면 그게 딱 신도시 유한마담이지 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에서 이어진 옷방으로 건너갔다. 월넛으로 짜 넣은 붙박이장이 사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뒤늦게 온 우기가 말했다.
- 이 정도면 거의 연예인인데?
옷방의 한가운데에는 티타늄 재질의 슈트캐리어 8개가 사열을 하듯 사이즈별로 늘어서 있었다. 모두 은색이었고 지금 막 소포로 받아 포장을 뜯은 것 마냥 깨끗했다. 그건 단 한 번도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져 화물칸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적이 없는 가방들이었다. 그 가방들은 라운지에서 승무원이 가져가 곱게 패킹해 부친 퍼스트클래스 손님의 가방만이 지킬 수 있는 고결함을 품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살이 생겼다. 대체 왜? 왜 저렇게 많은 캐리어가 필요하지? 일렁이던 가슴이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속을 알 수 없이 가라앉자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많아졌다.

- 집이 참 특이해요.
라이프스타일 구루에게 던지는 첫 질문치고 이렇게 성의 없는 질문이 또 있을까?
- 그런가요? 한국에선 다들 비슷한 집에 사니까 아예 집을 한 채 지을까 했어요. 그런데 집 짓는 게 손이 좀 많이 가는 일인가요? 제가 그만큼 열심히 뭔가를 알아서 하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때마침 아는 분이 맨션 분양 사업을 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제안서를 받았어요. 현관 쪽의 1층이 주차장 쪽의 3층이 되는 택지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 해외 거주 경험이 많으신가 봐요?
- 어려서 부모님이 해외에서 사업을 하셨어요. 밴쿠버에서 꽤 오래 살았죠. 한국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는데, 적응을 잘 못했다고 해야 하나? 1학년을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전교를 했어요.
- 아, 편입을 하셨군요. 그런데 한국에 다시 오시게 된 계기는요?
- 결혼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로 정착하게 됐어요. 관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요. 그런데, 1년에 반이 넘게 해외에서 지내다 보니 사실 베이스캠프 같아요. 그거 아세요? 의외로 한국이 수준도 높고 여기저기 다니기 편하다는 거? 국적기 서비스도 훌륭하고요.
주고받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의식으로 가라앉지 못하고 비눗방울처럼 떠 다녔다. 묻고 싶은 것들은 많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돈은 어떻게 벌었는지, 결혼은 누구와 했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유리 공예 브랜드와 혼자 있을 때 주로 해 먹는 요리에 대해 물어야 했다. 키무라 글라스가 품질은 리델보다 나은 것 같다. 소리를 들으면 품질을 알 수 있다는 대답. 혼자 있을 때는 절대 요리를 하지 않는다. 집에서 사람을 만나도 식사는 밖에서 한다는 대답. 본인이 만든 요리를 먹을 시간에 잘하는 사람이 만든 요리를 먹는 게 낫다는 대답. 잘 만들어진 질문과 대답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진실과 나의 본심은 만나지 못했다. 스타일은 취향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취향의 본질은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팔할이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인다. 돈이 전부는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사조로 통일된 취향은 글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유행한 바우하우스와 모던클래식은 20세기 게르만 디자인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카이저 이델의 램프나 임스 체어 모조품을 들여놓은 커피숍에 가면 감정이 왜곡되는 걸 느낀다. 하물며 짜장면 하나에도 서품이 있다. 모든 공간은 입구에서 판가름이 난다. 순간 뭔가가 깨졌다. 내 아파트의 현관에 서면, 가끔 열려있는 화장실 문 너머로 변기가 보인다.
- 짜장면에도 정승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 그럼요. 뉴월드 호텔에 팔취라는 중국집이 있거든요. 거긴 짜장면을 팔취면이라고 불러요. 일종의 시그니처죠. 짜장도 직접 만들고, 매일 짜낸 라드에 최고급 돼지 안심만 볶아요. 한번 드셔보시면 알 텐데.
- 그렇지만 결국 돼지기름에 설탕 볶는 건 똑같잖아요.
- 그것도 아니래요. 제가 어릴 때는 제대로 낸 돼지기름을 쓰는 곳도 있었는데, 요새는 다 그냥 식용유를 쓴대요. 고소함이 다르죠. 어차피 짜장면이 건강 생각해서 먹는 음식은 아니니까요.
- 그런데, 어렸을 때는 밴쿠버에 사시지 않았나요?
시린과 나의 눈은 아주 잠시 마주쳤다. 아니, 나는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 밴쿠버도 사람 사는 곳인데 짜장면이 없겠어요? 엄청 유명한 집이 있어요. 해룡반점이라고. 거기는 웬만한 중식 레스토랑보다 식사며 요리가 다 나아요. 진짜 중국인이 하는 중국집보다 한국인이 하는 중국집이 더 인기라는 게 웃기죠?
나는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정말로 보고 싶었지만 흘러간 표정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프로페셔널하지 못했던 에디터님의 태도 탓에 잡지 게재를 허락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문자는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오전에 왔다. 점심을 먹으러 나갈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어쩌면 나는 컷더등심이 시린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휴대전화에 ‘동의를 구하고 취재가 끝난 터라 게재와 편집의 권한은 당사에 있습니다. 비용 문제도 있고요’라고 썼다가 지웠다. 정말 우리에게 권한이 있나? ‘이유를 정확하게 밝혀주시지 않으면 게재 중단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비용과 품을 꽤 들여서요’라고 썼다가 다시 지웠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쇼핑백을 막내 책상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 선배, 컷더등심 집 대박이라면서요. 우기가 그러던데, 연예인 집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얘는 정말 사회생활을 어디서 배운 걸까, 라는 생각이 든 순간 문득 그 후배의 첫 선배가 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 어, 그렇더라. 뭐 그냥 딱 구도심 유한마담이야.
- 완전 대박. 사진 빨리 보고 싶다.
후배는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편집장과 상의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시린에게 문자를 보내고 편집장에게 달려갔다. 좋은 소식은 늦게 알려도 좋은 소식이지만 나쁜 소식은 늦게 알리면 더 나쁜 소식이 된다.

그날 저녁 프리미엄 정육식당에서 고기를 구우며 편집장에게 프로답게 처리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운을 뗐다. 편집장은 내 얘기를 들으며 한참 말없이 내가 구운 고기를 먹었다. ‘뭘 해서 돈을 벌었는지 집은 정말 좋더라고요’, ‘바이토닉 사장네 집 근처인데, 그 집보다 큰 것 같아요’, ‘트라이스타 빌라트는 정말 뭐람. 영어야 독일어야’ 등의 얘기를 꺼냈던 것 같다. 일반 회사에 다녔다면 나는 내 아래로 대리만 세 명쯤 둔 차장이었을 것이다. 편집장이 다른 회사에 다녔다면 아마 100명 정도를 이끄는 선임급 부장이나 상무쯤 됐을 것이다. 우리는 야만인의 습격을 받은 사원의 마지막 사제와도 같은 동지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나는 그 동아줄을 끝까지 붙잡았다. ‘사실 만나고 보니 대학교 동창’까지 얘기가 흘러가자 편집장이 내 말을 잘랐다.
- 컷더등심은 됐고. 뒷말 나오지 않게 포토한테 사진 보정에 신경 좀 써달라고 해서 액자 하나 짜 보내. 봐그 마크 찍어서 집에 걸어두라 그래.
편집장은 차돌박이를 만족스럽게 씹어 삼키고 잔에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 다른 사람 섭외할 시간 없으니까 인플루언서 특집 보판 시키고 다음 달까지 같은 급으로 꼭 하나 잡아 와. 진짜 이유진 너 또 그러면 죽는다. 다음 달에 내보내기로 했던 서핑 특집 사진 다 됐으면 지금부터 원고 써서 이달에 막아. 됐지? 됐으면 먹어. 나 원래 그 여자 별로였어.
- 선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우 모둠에 딱 두 점 들어있는 안창살 중 큰 덩이를 집어 편집장의 입에 넣어줬다. 편집장은 미간을 움츠려 짜증 난 티를 내며 받아먹더니 빈 맥주잔을 내게 내밀었다.

대학 첫 학기가 거의 다 지나가자 파벌이 갈리기 시작했고, 시린은 외로운 늑대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나마 친한 친구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나였다. 당시 나는 뒤늦게 찾아온 스무 살 사춘기 때문인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찮고 우스워 보였는데, 시린은 국·영·수를 중심으로 입시에 목을 맸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보였다. 나 자신도 수능으로 대학에 들어간 주제에 다른 아이들을 우습게 봤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는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때의 내가 그랬다는 걸 바꿀 수는 없다. 시린과는 시간표를 맞추거나 약속을 정해두고 만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마주칠 때면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나는 그달에 쓸 돈과 다음 학기 학비를 모으기 위해 과외를 두 개나 뛰던 터라, 그런 사정을 아는 시린이 자기 아빠의 카드로 밥과 음료를 사곤 했다. 한번은 시린에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담은 CD를 구워주기도 했다. 그녀는 ‘카라스 플라워스’의 ‘솝 디스코’라는 노래에 푹 빠졌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듣는다”며 “애덤 리바인의 보컬이 딱 내 취향”이라고 말했다. 좀 많이 잘나가는 동네 인디밴드 리더였던 애덤 리바인은 카라스 플라워스의 해체 이후 ‘마룬 파이브’를 결성했다. 애덤 리바인은 카라스 플라워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시린은 과연 헬리콥터를 몇 번이나 타봤을까?
나는 시린이 시간이 지나서는 나와 먹었던 짜장면을 아주 조금은 그리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나는 앞으로 가끔 시린이 떠오르면 웃겠다고 다짐했다. 시린은 언젠가 한 번은 “오키나와는 참푸르가 참 맛있어”라며 “참 맛있어서 참푸르인가봐”라고 말 하고는 혼자 웃었다. 나는 오키나와가 나라 이름인지 섬 이름인지, 참푸르라는 게 동물인지 식물인지도 모르던 시절이다. 시린은 “참푸르는 달걀 볶음”이라고 설명했다. 참푸르가 ‘찬푸루’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첫 직장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근근이 남은 월급을 모아 엄마와 오키나와에 간 적이 있다. 저가 항공을 타고 퀸사이즈 침대보다 딱 화장실 크기만큼 큰 호텔에 묵었다. 첫날 저녁 호텔에 짐을 풀고 허기를 채우러 근처의 이자카야에 갔다가 메뉴에 친절하게 한글로 쓰여 있는 ‘찬푸루’를 찾았다. 하긴 일본어 발음에 ‘참’이 어디 있고 ‘르’가 어디 있겠어, 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오키나와에서는 찬푸루에 여주를 넣었다. 여주를 넣은 찬푸루는 맛이 썼다. 우리 엄마가 먹지 못하고 뱉어낼 정도로 썼다. 인터뷰할 때 이 생각이 났었다면, 나는 시린에게 언제 처음 찬푸루를 먹었는지, 아직도 찬푸루를 좋아하는지 물어봤을 것이다. 찬푸루에도 서품이 있는지, 어느 호텔의 찬푸루가 정승쯤 되는지 물어봤을 것이다. 아주 프로답게.

※이 소설에 나오는 고유명사는 실제와 일치하더라도 우연임을 밝힙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