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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두 얼굴…“1급 모범수” “DNA 틀릴 확률 0에 가깝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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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반기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왼쪽)이 19일 수원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던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를 특정했다며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기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왼쪽)이 19일 수원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던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를 특정했다며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0년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는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모(56)씨로 특정됐다. 유전자(DNA) 분석 결과 당시 현장증거물 3건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됐다. 하지만 이씨가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어 경찰도 사실 확인에 주력하고 있다.

부산교도소에서 25년째 복역 중 #경찰 추궁에도 살인 혐의 부인 #혈액형 당시 B형 추정, 실제 O형 #“소량 시료분석 정확성 떨어진 듯”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19일 오전 브리핑을 열고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이씨를 특정해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이 지난 7월 15일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된 속옷 등 현장증거물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내 DNA 분석을 의뢰한 결과 3건의 사건 증거물에서 이씨의 DNA가 나왔다고 한다. 이씨의 DNA가 검출된 3건은 5차, 7차, 9차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들 사건은 피해자들이 착용하고 있던 스타킹과 블라우스 등으로 손과 발이 묶였고 시신이 농로와 야산 등에서 발견돼 동일범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경찰은 보관하고 있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된 다른 증거물도 국과수에 보내 추가 DNA 검사를 의뢰한 상태다.

이씨는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처제(당시 20세)에게 성폭력을 저지르고 살해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부산교도소에서 25년째 복역 중이다. 숨진 이씨의 처제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들처럼 스타킹으로 팔·다리 등이 결박된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1, 2심 재판부는 이씨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은 우발 범행일 가능성이 있다고 파기환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제 살해, 연쇄살인 수법과 같아

국과수 DNA 감식 과정,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국과수 DNA 감식 과정,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는 수감 생활 중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1급 모범수’로 분류되어 있다. 평소 말이 없고 조용히 수감 생활을 해 교도소 내에서도 이씨가 화성의 유력 용의자로 알려진 뒤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씨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이씨가 수감된 부산교도소를 찾아가 1차 조사를 벌였지만 이씨가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며 “이씨를 추가로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경찰에게서 범행을 추궁당한 이후에도 이씨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경찰은 추가 조사를 위해 이씨를 경기도 인근 교정기관으로 이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 경찰은 생존자와 목격자 등의 진술을 토대로 ‘보통 체격의 20대’를 용의자로 봤다. 이씨도 보통 체격으로 당시 20대였다.

하지만 사건 발생 당시 이씨는 용의 선상에서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오래 추적한 하승균(73) 전 총경은 “이씨는 당시 용의 선상에 없었던 인물”이라며 “이씨가 당시 용의자였다면 DNA를 수집했을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이씨가 결혼 등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고 1994년 처제를 살해해 수감되면서 수사망을 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 사건 당시 용의자의 혈액형과 이씨의 혈액형이 다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씨가 진범이 맞느냐는 혼선이 일기도 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 경찰은 4차, 5차, 9차, 10차 사건 범인의 정액과 혈흔, 모발 등을 통해 용의자를 B형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씨의 혈액형은 O형으로 확인됐다. 이씨의 항소심 판결문에는 “범행 현장에서 수거된 모발 중 피고인(이씨)의 혈액형과 같은 O형의 두모 2점, 음모 1점 등이 나왔다”고 적혀 있다. 이씨가 당시 경찰의 의심을 샀어도 다른 혈액형으로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형 확정자 DNA 데이터베이스가 큰 역할

경찰 관계자는 “DNA가 일치하는데 혈액형이 다를 수는 없다”며 “1980년대는 우리나라 과학수사 기술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소량의 시료에서 정확한 혈액형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다른 미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화성의 DNA 분석을 의뢰하게 됐다고 했다. 2005년 수원 지역에서 발생한 카페 여주인 살인사건과 2011년 부천 야산에서 발견된 여성 시신 사건이 그것이다. 두 사건도 발생 당시엔 DNA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이뤄진 국과수 조사에서 용의자의 DNA가 나왔다. 경찰은 이 결과를 토대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DNA 분석을 요구했다고 한다.

정용환 대검 DNA 화학분석과장은 “2010년 ‘DNA 신원 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형 확정자 등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 작업을 진행해 현재 16만 명의 DNA 정보를 수록했다”며 “이씨도 이 과정에서 지난달 9일 특정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체액 등에서 DNA 시료를 추출해 증폭시킨 뒤 복제해 확인하기 때문에 소량의 DNA 정보만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며 “이 DNA 정보를 DB와 비교해 동일인을 식별하기 때문에 동일인이 아닐 확률은 10에 23승 분의 1의 확률로 극히 낮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가 진범으로 드러나도 처벌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2006년 4월 2일 마지막 사건인 10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은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에는 피의자에 대한 처벌의 의미도 있지만,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거기에 집중해서 하겠다”며 “수사가 끝나면 ‘공소권 없음’으로 이씨를(검찰에) 송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모란·이후연·김수민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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