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노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제1부 독립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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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30년12월 겨울방학 때 서울에서 형이 진주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후 진주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왔다. 이때부터 또 우리집안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싸이게 되었다. 어머니는 전혀 식사를 끊고 한숨만 쉬셨다. 점같은 것은 전혀 보지 않던 어머니가 점쟁이를 찾아다녔다.
아버지는 형에게 서울 가서 공부하지 말고 그만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사는 대로 살자고 하셨다. 형은 형사가 찾아온 것은 다만 동정을 살피려 온 것이지 무슨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고 부모님을 안심시키려했다.
그러나 근심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솟구치는 슬픔에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본사람이 시키는 대로하고 벼슬도 하고 돈도 벌고 논도 사는데 우리집은 왜이런가? 잡혀 갇히고 집안사람들은 왜 하루도 마음놓고 살지 못하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가?
형이 나쁜 사람인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열번도 고개를 더 흔들었다.
겨울방학동안 우리형은 별탈 없이 무사하였다. 서울로 떠나는 아침 아버지는 형에게 몇번이나 같은 주의를 하셨다.『눈 딱 감고 병신노릇을 해서라도 고등보통학교나 무사히 졸업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이 서울에 간지 한달 남짓한 이듬해 2월말쯤 또 형이 체포되었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우리집안은 정말 방마다 눈물이요 한숨이었다. 저녁때가 되어도 밥도 짓지 않고 아무도 밥을 먹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형수가 부엌에 가서 밥을 차리려하니 어머니는『아무도 밥 먹을 사람이 없으니 그만두고 갑동이 밥이나 차려다 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형수가 내 밥상만 차려 가지고 왔다. 『데름! 데름은 밥을 먹어야 하오. 데름은 형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이집을 지켜야하오. 아무 걱정하지 말고 밥 먹으시오』형수의 이 말에 그만 참고있던 울음이 왈칵 솟구쳤다. 아무도 없는 텅 빈방에서 혼자 실컷 울고 난 뒤 숟가락을 들었다.『내가 살아야지. 우리형 원수도 갚고 우리집을 지켜야지』하고 입술을 깨물면 또 눈물이 쏟아져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 전해 여름방학을 마치고 상경길에 나선 형은 진주역 앞에서 불쑥『갑동아! 너는 부모님 걱정 끼치지 말고 말 잘 들어야 한다. 나는 너를 믿고 간다』는 작별의 말을 했다. 나는 「너를 믿고 간다」는 형의 이 한마디를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형은 그때 이미 독립투쟁에 몸을 바칠 각오를 했던 것 같다.
그 이튿날 아버지는 빚을 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또다시 서울로 가셨다.
3월이 가고 4월이 되어도 형은 석방되지 않았다. 그 동안 어머니는 빚을 내어 자꾸 서울로 보냈다.
나는 6학년이 되었다. 진주도 이때까지 면이던 것이 그해 4월1일부터 읍으로 승격하였다.
경상남도가 생길 때부터 도청은 원래 진주에 있었는데 6년 전인 1925년에 일본사람이 많이 사는 부산으로 뺏기고 말았다.
5월이 되자 아버지가 형을 겨우 병보석시켜 진주집으로 돌아오셨다. 형의 얼굴은 하얀 박속 같이 창백하고 부어있어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옛날의 형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형을 살리겠다고 하루 몇번이고 손수 보약을 달여 먹였다.
형은 젊고 원래 몸이 건강해서인지 한달쯤 조리를 하니 거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약수건으로 약을 짜고 있는 것을 내가 옆에서 보고 있는데 형수가『아버님! 데름도 몸이 약한데 약을 좀 먹이도록 하시지요』하는 것이었다.
『오냐. 갑동이는 아직 어리니까, 우선 급한 큰아부터 먹여야지』아버지 대답이었다. 형수는 아버지나 어머니나 모두 정신이 다 형에게 쏟아져 있는 것이 늘 민망한 듯이 나를 돌봐주는 것이었다.
나의 밥이나 옷은 형수가 전부 다 해주었다.
그런데 6월말쯤인 것 같다. 상당히 더울 때였다. 새벽녘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 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막동이인 덕에 보통학교 6학년 때까지 어머니와 한방에서 자고 있었다.
듣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는 말이 들려왔다.
『저것이 가다가 붙잡히면 우찌할라고 중국으로 도망을 간다고 하는고….』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요번에 감옥에 늘어가면 몇해가 걸릴는지 모른대요. 우찌해야 좋을까요?』
어머니의 걱정하는 소리였다.
『참 기가 차오. 이래도 못하고 저래도 못하고』
『우리가 이래도 못하고 저래도 못하는데 차라리 제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 않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죽기는 왜 죽어요. 살라고 가는데』
『가면 살까?』
『글쎄요. 살라고 발버둥질이나 쳐봐야지요』
『돈을 천원이나 도라하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형은 일경을 피해 중국으로 달아날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도피자금1천원을 요구했던 것이다.『그래도·우까것소. 살림을 못살아도 다큰 자식 생명은 구해야지요』
『조상님들이 모은 살림을 내대에 와서 자식을 잘못 낳아다 없애다니…』
나는 그만 눈물이 솟아오르고 말았다.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 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한숨을 쉬려해도 부모님이 잠을 깬 것을 알까봐 꼼짝도 않고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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