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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덕 쌓으면 뭐하나, 간신 들끓는데…주희에 맞선 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16)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와 진량(陳亮). [사진 Wikimedia Commons]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와 진량(陳亮). [사진 Wikimedia Commons]

중국 남송(南宋) 시대에 태어나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조선 유학자들에게 ‘주자(朱子)’로 추앙받았던 주희(朱熹)는 생전 두 사람으로부터 큰 학문적 도전을 받았다. 하나는 주희의 객관적 관념론에 맞서 주관적 관념론을 주장했던 육구연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서 행위자의 ‘동기’를 중시했던 주희의 생각에 반대하며 행위의 ‘결과’를 강조했던 진량이다. 이 중 진량이 바로 이번 화에서 다룰 인물이다.

주희는 치열한 자기수양을 통해 도덕적 인격을 갖춘 통치자가 인의(仁義)로운 동기를 가지고 정치를 펼치게 되면 그 도덕성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모든 일이 자연스레 잘 풀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통치자가 아무리 올바른 마음과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정치는 선과 악이 혼재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이에 동시대 학자였던 진량(陳亮)은 동기가 아닌 ‘결과’를 강조하며 주희의 대척점에 섰다.

진량은 정치는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는 점에서 ‘사공(事功)’을 내세우고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패도(覇道, 비정상적인 수단)’도 용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면 통치자의 동기가 순수한지 도덕적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주희(사진)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비정상적인 수단도 용인할 수 있다는 진량의 주장에 강력하게 비판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주희(사진)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비정상적인 수단도 용인할 수 있다는 진량의 주장에 강력하게 비판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이러한 주장에 대해 주희는 강력하게 비판했다. 진량의 말을 따른다면 통치자라는 사람들이 이익과 효용을 앞세워 도덕원칙을 무너뜨리고 공공히 사사로운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희는 정치의 공공성이 붕괴되고 말 것이라며 “기괴하다”, “두렵다”, “개탄스럽다” 는 말들로 진량을 공격했다.

이처럼 주희가 진량을 비판하자 주희를 따르는 사림 역시 진량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주희는 진량의 학설을 부정하면서도 진량 개인에 대해서는 진량이 죽을 때까지 편지를 주고받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에는 열흘 간 함께 지내며 학문적 토론을 벌였고 진량이 죽자 그의 묘비문을 써주기도 했다.

진량도 주희를 ‘사람 중의 용(人中之龍)’이라 평가하며 존경했는데 비록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서로를 존중한 것이다. 하지만 주희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고, 진량을 상종하지 못할 이단으로까지 몰아붙였다.

진량은 모함을 받고 세 번이나 투옥되었고, 쉰 한 살에 겨우 급제해 진사가 되었지만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진량은 모함을 받고 세 번이나 투옥되었고, 쉰 한 살에 겨우 급제해 진사가 되었지만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이런 상황에서 진량 개인의 삶도 평탄하지 못했다. 모함을 받고 권력자의 노여움을 사서 세 번이나 투옥되었고, 관리가 되어 경세가로서의 포부를 펼치고 싶었지만 과거시험을 보는 족족 떨어졌다. 낙방한 횟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쉰 한 살인 1193년이 되어서야 겨우 급제해 진사가 되었지만 이듬해인 1194년에 죽었으니, 평생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것이다.

대다수 유학자들로부터 외면 받고, 존경하던 주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좋은 정치를 펼쳐 나라와 백성들에게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좌절과 고독으로 가득했던 삶. 그럼에도 진량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나아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당대의 현실이 답답했다. 금나라에 눌려 국력은 쪼그라들고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며 간신들이 조정을 더럽히고 있는 그 때에, 실질적인 대책 없이 그저 황제에게 마음을 수양할 것만 강조하는 유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공리(功利)를 추구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결과를 중시한 것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이론을 다듬어가며 주류학계의 견해에 맞섰다.

물론 진량의 주장이 정답은 아니다. 그에 대한 주희의 문제제기는 타탕한 면이 있다. 다만 이상과 이념이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 학문이 공리공론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위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교훈이다. 진량이 불우한 삶에 굽히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펼쳤기 때문에 그 정신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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