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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 40대 맞고 관직 강등…왕양명을 다시 세운 힘 뭘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15)

‘험난함과 편안함은 본래 마음속에 있지 않으니(險夷原不滯胸中)
어찌 뜬구름이 아득한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다르겠는가(何異浮雲過太空)’

명나라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지은 ‘범해(泛海)’라는 시의 일부다. 왕양명, 본명은 왕수인(王守仁)으로 호인 양명(陽明)을 따서 보통 왕양명이라고 불린다. 1472년 중국 절강성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가정형편과 학문을 좋아했던 할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 열다섯 살에 가출해서 한 달 동안 국경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등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중앙포토]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 열다섯 살에 가출해서 한 달 동안 국경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등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중앙포토]

15세 때 가출해 북쪽 국경 답사  

왕양명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열두 살 때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공부”라고 말했는가 하면 열다섯 살에는 홀로 가출해 한 달 동안 북쪽 국경을 답사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장차 관직에 나아가 외적의 침입을 막고 백성을 지켜내기 위해 변방의 상황을 잘 파악해 둘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시험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 왕화는 장원급제한 인물이고 왕양명 역시 총명해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스물두 살과 스물다섯 살에 연이어 과거에 낙방했다. 그럼에도 의기소침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꾸준히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썼고 1499년 스물여덟 살 때 마침내 과거에 합격한다. 이후 그는 유학을 공부하고 틈틈이 병법과 서예를 익히며 관리로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갔다.

중국 명나라 제10대 황제 주후조. 왕양명은 주후조가 총애한 유근 세력에 맞섰지만 실패해 중벌을 받게 된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중국 명나라 제10대 황제 주후조. 왕양명은 주후조가 총애한 유근 세력에 맞섰지만 실패해 중벌을 받게 된다. [사진 Wikimedia Commons]

그러던 1506년 왕양명의 일생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발생한다. 한 해전 효종 주우탱이 붕어하고 그의 아들 무종 주후조가 보위에 올랐는데 주후조는 환관 유근과 유근 휘하의 일곱 환관을 총애했다. 이들이 ‘여덟 호랑이’라고 불리며 온갖 악행을 일삼자 보다 못한 조정 대신들이 탄핵에 나섰지만 오히려 역공을 받아 숙청당한다.

이 과정에서 병부주사로 있던 왕양명도 용기 있게 유근 세력과 맞섰지만 실패했다. 유근의 보복으로 맨살에 곤장 40대라는 중벌을 받게 된다. 내려치는 강도에 따라 며칠 앓다가 일어날 수도, 뼈가 부러져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도,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형벌이었다. 왕양명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될 정도로 가장 호된 장형을 당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왕양명은 목숨을 구했다. 6개월간 더 감옥에 있던 그는 용장(龍場) 고을의 역승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말단의 최하급 관리로 강등된 것이다. 더욱이 용장으로 가는 길에 유근이 보낸 자객들이 쫓아왔다. 얼마나 급박했던지 왕양명이 강물에 몸을 던져야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참담한 신세.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쳐 보이겠다는 꿈은 좌절되고 간신에게 쫓겨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왕양명은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겠다고 다짐한 선비가 어려움이 닥쳤다고 포기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는 서두에 소개한 시를 읊으며 자신을 막아선 고난과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결심한다. 험난함과 편안함은 부질없는 뜬구름과도 같은 것,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나를 성장시키느냐고 어떻게 나를 단련시키느냐다.

왕양명은 생각했다. “옛 성인(聖人)들께서 지금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찌하셨을까? ‘그곳은 누추한데 괜찮으십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공자께선 ‘군자가 사는데 어찌 누추하겠느냐?’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래 중요한 것은 내 마음가짐이다. 이치는 내 마음속에 있다.” 훗날 ‘용장오도(龍場悟道)’라고 불리게 되는 깨달음이었다.

그 후 왕양명은 객관사물에 대한 궁리(窮理) 공부를 중시하는 성리학과는 달리 바로 내 마음 속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역량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마음(心)’을 중시하는 일련의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이것이 양명학이다. 절망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학문적 성찰의 동력으로 삼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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