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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가에서 학자로…귀양 간 정약용이 연 새로운 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 (14)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 정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으나 정조의 승하 이후 18년간 유배를 떠나게 된다. [중앙포토]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 정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으나 정조의 승하 이후 18년간 유배를 떠나게 된다. [중앙포토]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 정조의 관심과 격려 속에서 테크노크라트로 활약했던 그였지만 정조가 승하하면서 이내 위기를 겪는다. 서학을 신봉한다는 죄목으로 1801년 2월 8일, 그의 멘토인 이가환, 친형 정약전과 정약종, 매부 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장기현(長鬐縣, 포항)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강진현으로 옮겨졌다. 무려 18년에 걸친 유배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후 1803년(순조 3년) 대왕대비가 그를 석방하라고 지시했지만, 재상이었던 서용보가 반발해 무산되었고, 1810년(순조 10년) 아들 학연이 나라에 아버지의 원통함을 호소함으로써 방축향리(放逐鄕里, 관리에게 내려지는 처벌의 일종이지만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거주할 수 있다)가 결정되었지만, 이 역시 대간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다. 채제공의 뒤를 이어 남인 재상감으로 꼽혔던 그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관직에 나아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경세제민의 포부는 더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고, 자신을 믿고 후원한 임금은 세상을 떠났으며,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고초를 겪고 있는 상황. 자신 역시 유배지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귀양 생활을 하는 처지. 내 앞에 열려 있던 문이 야속하게 닫혀버리는 모습을 보며 정약용은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일까?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죽고 마는가?

하지만 정약용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가 남긴 글을 보자.

“아침에 햇볕은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것이 세상의 진리다. 운명은 돌고 돌아 멈추지 않는 것이니 뜻이 있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 때문에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이 있어야 하니 두 눈에 천지를 품고 두 손에 우주를 담아야 할 것이다.”

즐거움과 괴로움, 성공과 실패, 영광과 좌절, 행복과 불행은 돌고 도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주저앉지 말고 마음속에 품은 뜻과 기상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정약용도 동의한다. “화와 복이 이르는 이치에 대해 옛사람들도 의심한 지 오래됐다”라고.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라도 끝내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간악하고 방탕한 사람이 평생 복을 누리는 경우도 많다고. “다만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도리이므로 군자는 그저 부지런히 선을 행할 뿐”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아들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데 실상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폐족은 오직 벼슬길만 힘들 뿐 성인이 되고 훌륭한 문장가가 되고 진리에 통달한 선비가 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도리어 크게 나은 점이 있으니 과거시험에 힘을 쏟을 필요가 없지 않으냐? 또한 빈곤하고 궁핍한 고통이 마음의 뜻을 단련시키고 성찰하는 능력을 키워줄 것이다.”

경세가가 되는 문은 닫혀버렸다. 관리가 되어 나라를 개혁하고 백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길은 막혀버렸다. 그러나 선비가 출입하는 문이 그것뿐이겠는가? 학문을 닦고 수양하여 군자가 되는 길, 좋은 저술을 남기는 목표는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다산 정약용이 유배 생활 동안 머물던 곳. 이곳에서 아방강역고, 논어고금주, 목민심서 등 수백 권의 책을 완성했다. [중앙포토]

다산 정약용이 유배 생활 동안 머물던 곳. 이곳에서 아방강역고, 논어고금주, 목민심서 등 수백 권의 책을 완성했다. [중앙포토]

정약용은 이 말을 몸소 실천해 보이기라도 하듯 학문과 집필에 매진했다.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수백 권의 빛나는 저술이 이 시기에 완성된다. 비록 ‘경세가 정약용’의 문은 닫혀버렸지만, 자신의 저술이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를 통해 세상에 기여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학자 정약용’의 문을 연 것이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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