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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서 후퇴한 김유신 아들이 죄를 씻은 방법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13)

김유신은 아들 원술이 적장에게 패하고 살아서 돌아오자 부자의 연을 끊으려 한다. 대오각성한 원술은 용서를 빌고 다시 적진에 나가 싸워 큰 공을 세운다. 사진은 원술의 화랑정신을 묘사한 영화 '원술랑'의 한 장면. [사진 원술랑 스틸]

김유신은 아들 원술이 적장에게 패하고 살아서 돌아오자 부자의 연을 끊으려 한다. 대오각성한 원술은 용서를 빌고 다시 적진에 나가 싸워 큰 공을 세운다. 사진은 원술의 화랑정신을 묘사한 영화 '원술랑'의 한 장면. [사진 원술랑 스틸]

임전무퇴(臨戰無退). 원광법사가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내려준 다섯 가지 계율(흔히 세속오계라고 부른다) 중 하나로 신라 화랑의 상무(尙武) 정신을 상징한다. 백제, 고구려, 당나라 등 자신보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들과 맞서 싸우며 성장한 신라는 전장(戰場)에서의 물러섬 없는 용기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귀산, 관창, 반굴, 죽죽, 거진 등 화랑 혹은 화랑 출신의 장수들은 적진으로 용감히 뛰어들어 목숨을 바쳤는데, 패색이 짙어져 있는 상황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임전무퇴’를 지키지 못한 인물이 나타난다. 김원술(金元述). 삼국통일의 절대적인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그가 곧 신라 자체나 다름이 없었던 김유신의 아들이다.

672년 음력 8월, 신라와 당나라가 벌인 석문(황해도 서흥 부근) 전투에서 신라군이 대패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김원술은 끝까지 적과 싸우고자 하였지만 그를 보좌하던 담릉이 만류했다. “대장부가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죽더라도 이루는 것이 없다면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원술이 달려나가려고 하였으나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가 정말 죽기를 각오했다면 담릉의 만류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은 삼국사기.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삼국사기』에는 '원술이 달려나가려고 하였으나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가 정말 죽기를 각오했다면 담릉의 만류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은 삼국사기.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김원술이 반박했다. “어찌 구차하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런다면 장차 아버지를 어찌 뵐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미 원술의 마음은 흔들렸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원술이 달려나가려고 하였으나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아서 끝내 죽지 못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가 정말 죽기를 마음먹었다면 담릉의 만류쯤은 그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김원술은 상장군(上將軍, 최고지휘관) 등 지휘부와 함께 패잔병을 수습하며 퇴각했는데 이때 원술의 행동과 대비되는 인물이 또 나타난다. 당나라 군대의 추격이 신라군 바로 뒤에까지 이르면서 누군가 시간을 벌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보통 이럴 때면 김원술과 같은 고위급 자제들, 화랑 출신들이 자원해 나서는 것이 신라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김원술은 침묵했고 대신 노장군 아진함이 “공들은 힘을 다해 빨리 가시오. 내 나이 이미 일흔이니 앞으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소? 지금이 내가 죽을 때인 것 같소”라며 아들과 함께 당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아진함의 분전으로 신라군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김유신은 아들 김원술이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오자 격노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불충이자 불효라고 여겼고,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진은 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 [중앙포토]

김유신은 아들 김원술이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오자 격노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불충이자 불효라고 여겼고,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진은 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 [중앙포토]

그렇게 김원술이 무사히 돌아오자 아버지 김유신이 격노한다. 그는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김원술을 내쫓은 후 왕에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문에 먹칠하였으니 죽여야 하옵니다”라고 청했다. 이제껏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바쳤다. 고귀한 가문의 자식일수록 모범을 보였다. 조카 반굴도 황산벌에서 산화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김유신의 자식이 전쟁터에서 도망치다니. 용납할 수 없는 불충이자 불효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진 전쟁에서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복수를 준비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김유신의 분노는 아들이 화랑의 정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왕이 “원술은 비장에 불과한데 그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없다”라며 사면해주었지만, 김유신은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김유신의 부인 역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들에게 “너는 선친께 아들 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너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라며 차갑게 물리친다.

김원술은 사무치게 후회했다. 몇 날 며칠을 통곡하던 그는 태백산에 들어가 은둔하며 자신의 죄를 씻을 기회가 오기를 바랐다. 치열하게 무예를 단련시키고 병법을 익히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675년 음력 9월, 당나라 군대가 매소천성으로 쳐들어오자 그는 다시 전장으로 나아갔고 누구보다 앞장서 싸우며 큰 공을 세운다. 비록 전쟁에서 도망치는 과오를 범했으되 그 잘못을 잊지 않았고 온 힘을 다해 만회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원동력이었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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