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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이 바흐만 145분, 요요마라서 가능했던 무대

중앙일보

입력

“두려움은 우리를 작고 위축되게 하지만 문화는 우리를 커지게 합니다.”
8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첼리스트 요요마(64)의 말이 스크린에서 흘러나왔다. 곧 등장한 요요마가 홀로 커다란 무대에 앉아 바흐 연주를 시작했다. 40대의 바흐가 첼로 독주를 위해 쓴 6곡의 모음곡 1번의 첫곡 프렐류드였다.

8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바흐의 모음곡 전곡을 연주한 첼리스트 요요마. [사진 크레디아]

8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바흐의 모음곡 전곡을 연주한 첼리스트 요요마. [사진 크레디아]

그리고 이 연주는 145분 동안 계속됐다. 1번부터 6번까지 차례로 연주되는 동안 쉬는 시간은 없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각 곡이 6곡의 세트로 돼 있다. 체조경기장을 채운 청중 5000명과 한 명의 연주자는 이 36곡을 꼼짝않고 앉아 들었다.

8일 서울서 열린 요요마의 바흐 프로젝트

낮은 음역의 악기가 두시간 넘게 홀로 연주하는 것은 청중에게 쉽지 않은 공연이다. 하지만 이날 요요마의 바흐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했다. 요요마는 심각하고 엄숙한 선율 대신 특징적 리듬을 강조했다. 바흐의 모음곡은 모두 기본적으로 춤곡이다. 빠르고 느린 춤곡이 교차되는 형식이다. 요요마가 리듬을 골라 강조하자 모든 음악이 본래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요요마는 또 체육관 음악회에 맞게 소리의 강약을 조절했다. 콘서트홀이었다면 소리의 질이 중요했겠지만 이날 무대에서는 음악의 윤곽이 강조돼야 했다. 요요마는 세세한 것에 집중하는 대신 전체적인 선을 분명히 그렸다. 청중은 캐리커처와 같은 쉬운 바흐와 함께 2시간 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미국 첼리스트인 요요마는 이날 곡 소개와 인사를 한국어로 했다. [사진 크레디아]

미국 첼리스트인 요요마는 이날 곡 소개와 인사를 한국어로 했다. [사진 크레디아]

36곡을 쉬지 않고 연주하는 것은 사실상 체력전이었다. 4세부터 이 곡을 연주했다는 요요마에게도 쉽지 않았던 듯 모든 부분이 완벽하진 않았다. 4번째 모음곡의 5번째 곡에서는 단순한 테크닉에서도 잇따라 실수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 실수가 사소했던 이유는 요요마 특유의 바흐가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다.

요요마는 세번째 모음곡을 앞두고 “삶의 기쁨이 있는 음악”이라 청중에 소개했고 모음곡 5번을 앞두고는 “내가 고통스러울 때 의지했던 곡”이라고 했다. 이처럼 요요마가 파악하는 바흐 모음곡은 인간의 많은 감정이 범벅된 작품이었다. 모음곡 3번의 5번째 곡인 부레에서는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음악을 해석했다. 요요마가 2001년 미국 9ㆍ11 테러 희생자,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 희생자를 추모할 때 연주했던 5번의 4번째 곡 사라방드는 초연히 고통을 다루는 듯 비교적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이날 공연은 원래 야외 공연장인 88잔디마당에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태풍 예보로 공연장이 실내로 사흘 전 변경됐다. 관객은 예매 금액을 모두 환불받을 수 있었지만 취소는 1000건 정도로 적은 편이었다. 쉬운 연주곡이 아니었는데도 청중 반응이 뜨거웠던 셈이다. 60여년 전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요요마는 이처럼 세계적으로 인기 많은 첼리스트로 꼽힌다.

8일 공연은 원래 야외에서 예정됐지만 태풍으로 실내인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사진 크레디아]

8일 공연은 원래 야외에서 예정됐지만 태풍으로 실내인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사진 크레디아]

이번 공연은 요요마의 바흐 프로젝트 중 하나다. 그는 2년동안 전세계 36곳에서 바흐의 모음곡 전곡을 연주한다. 서울은 그 중 20번째 도시다. 공연 전 영상에서 밝혔듯 그가 이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한 뜻은 크다. “이 여행은 우리 모두의 문화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내가 항상 하는 생각은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라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이다. 함께라면 우리는 훨씬 큰 힘으로 다루기 힘든 문제에 맞설 수 있다. 문화가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요마는 이런 신념으로 국경 도시에서, 산업이 쇠락한 곳에서, 음악 공연이 별로 없는 지역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바흐를 연주하면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는 요요마의 뜻을 청중이 단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날 요요마의 바흐만큼은 명쾌하고 쉬웠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문화”라는 요요마의 말도 쉬운 개념은 아니었지만 그의 연주만큼은 어렵지 않았다. 6곡의 연주가 모두 끝날 때쯤에는 그가 왜 이런 프로젝트를 하는지, 특히 왜 바흐를 선택했는지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는 스타 첼리스트 요요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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