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광화문 현판뿐 아니라 글씨도 바꿔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

문화재청이 광화문 현판을 교체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현판이 현재 흰색인데 고증 결과 검정색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전에 교체할 땐 고증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인데, 필자가 보기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새로 건지 얼마 안 되는데 현판에 사용한 나무가 갈라져서 언제 반 토막이 날지 몰라 현판 교체가 불가피하게 된 게 실제 이유라고 본다. 나무가 갈라지는 건 원래 사용하려던 품질 좋은 금강송을 누군가 바꿔 쳐서 불량품을 쓴 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현재 글씨는 사진에 기초한 그림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글씨 돼야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된 나무를 사용해 현판을 바꾼다 해도 머지않은 장래에 또다시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 것이다. 현판의 색깔보다 더 중요한 건 현판 글씨, 즉 ‘광화문’ 글씨인데 이걸 놔두고 바꿔서이다. 현재 글씨는 서예의 관점에서 볼 때 글씨가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단순 복원하는 데 집착한 나머지 희미한 사진에 기초해서 비슷하게 그려서다. 이런 식의 복원이라면 복원의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서예의 기운과 생동감을 제대로 살려낼 수 없다. 그러니 현판만 교체하는 건 잘못된 글씨를 그대로 둔 채 액자만 바꾸는 격이다.

광화문 현판 글씨에 우리가 공을 들여야 하는 건 대문의 현판 글씨가 건축물의 화룡점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담으로 막혀, 건물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대문의 현판 글씨를 보고 건물주의 의식이나 문화 수준을 가늠했다. 그래서 건물주는 대문 현판 글씨에 많은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광화문은 궁궐 대문인데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광화문의 뜻을 풀이하면 빛(光)으로 화해(化) 만백성에게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빛으로 화할까? 그건 경복(景福), 즉 큰 복이다. 그러니 왕의 교지가 광화문을 나서는 순간 ‘사방에 널리 퍼져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邦)’ 는 뜻이다.

참고로 창덕궁 대문 이름은 돈화문인데 아름다운(昌) 덕(德)이 도탑게(敦) 화한다는(化) 의미이다. 즉 왕의 교지가 오랫동안 만백성에게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또 창경궁 대문 이름은 홍화문인데 창성하는(昌) 경사(慶)가 넓게(弘) 화한다는 의미이다. 즉 삼천리 방방곡곡에 혜택이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경희궁 대문 이름은 흥화문인데 경사스런(慶) 기쁨(熙)을 일으키게(興) 한다는 의미이다. 즉 왕의 교지를 기다렸다는 듯 백성이 반갑게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런 좋은 의미를 전달하는 글씨가 빼어나야 하는 건 당연하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받기 위해, 이들을 정치적으로 불우하게 빠뜨렸던 당시 힘깨나 썼던 사람들조차 애썼던 건 이런 이유이다. 이 정도 서예가의 글씨를 대문에 걸어 놓아야 세간의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광화문의 현판 나무보다 현판 글씨가 더 중요하다. 게다가 광화문 현판 글씨는 경복궁 전체 건축물의 화룡점정을 넘어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얼굴에 해당한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궁궐 대문에 광화·돈화·홍화·흥화라고 하는 빼어난 이름을 지닌 데가 어디 있는가? 이런 수준 높은 의미를 지닌 글씨가 함량 미달이라면 이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애플의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그 디자인에 세상 사람들이 놀랐다. 스티브 잡스가 공을 들인 탓인데 그의 디자인 개념은 대학 시절 잠시 익혔던 서예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예란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예술인데 잡스는 아이폰 디자인을 통해 그 조화를 이뤄냈다. 이렇게 보면 광화문 글씨는 예술 차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문화 수준을 높여 산업경쟁력까지 견인할 수 있다.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