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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리라’ 상상 훈련…씨름왕 이주용, 암을 메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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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항암치료 중 샅바 잡는 모래판 스타

2차 항암치료를 마친 이주용 선수는 9월 10일 전남 영암군 체육관에서 개막하는 추석장사씨름대회에 출전한다. 불우한 시간을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낸 이 선수는 우승을 노리고 있다. 신인섭 기자

2차 항암치료를 마친 이주용 선수는 9월 10일 전남 영암군 체육관에서 개막하는 추석장사씨름대회에 출전한다. 불우한 시간을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낸 이 선수는 우승을 노리고 있다. 신인섭 기자

추석이 다가온다. ‘한가위’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스포츠는 씨름이다. 하지만 씨름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격투기로 전향한 최홍만 이후 씨름 선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린 적이 별로 없다. 올해도 추석장사씨름대회가 9월 10∼15일 전남 영암군 실내체육관에서 열린다. 이번에는 눈여겨봐야 할 선수가 있다. 한라급(105kg 이하)에 출전하는 이주용(36·수원시청)이다. 그는 현역 최다 우승(금강장사 8회, 한라장사 9회, 통합장사 1회) 기록을 갖고 있는 베테랑이고, 갑상샘암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를 하고 있는 환자다.

현역 최다 18승, 작년 갑상샘암 판정 #수술, 1차 치료 뒤 대회 출전해 3위 #2차 치료 끝나자 추석 꽃가마 도전 #100kg 역기 드는 상상, 온 몸 땀 뻘뻘 #“힘들어도 버티자” 무릎·팔에 호소 #성장기 학대·굶주림 견뎌 강철 멘털

오금당기기 등 화려한 기술씨름을 구사하는 이주용은 지난해 6월 단오장사에 올랐다. 그 직후 건강검진에서 갑상샘암 판정을 받았다. 암세포는 임파선까지 전이되고 있어서 수술이 불가피했다. 그랬던 그가 1차 항암치료를 마친 뒤 출전한 올해 단오장사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2차 항암치료를 마친 뒤 맞는 추석장사에서는 통산 19번째 우승에 도전한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런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암 환자가 천천히 달리는 것도 힘겨울 텐데,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하는 모래판에서 상대를 눕힐 수 있다니. 최근 수원시청 씨름 선수단의 멘털 코칭을 이끌었던 천비키 코치는 “이주용 선수는 매우 뛰어나고 기발한 멘털 관리 능력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했다. 호기심을 안고 수원으로 갔다.

수원 경기대학교 안에 있는 씨름 훈련장에서 만난 이주용 선수는 암 환자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고 건강해 보였다. 암 수술 뒤 항암치료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일반인이 상상도 못할 강도로 운동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기술 거는 순간 세세히 묘사 ‘감각일기’

지난해 6월 단오장사대회에서 한라장사에 오른 이주용 선수. [사진 이주용]

지난해 6월 단오장사대회에서 한라장사에 오른 이주용 선수. [사진 이주용]

“1차 항암치료가 끝난 뒤 4∼5개월 준비하고 단오대회를 뛰어 3등을 했어요. 어마어마한 훈련량을 소화한 거라 제 자신이 기특할 정도였죠. 운동 쉬는 동안 한 번도 씨름 생각을 놓지 않았어요. 제가 대학 때부터 하던 게 ‘상상으로 하는 체력운동’입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감각이나 기술 쪽에만 있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벤치프레스(누워서 역기 들어올리기)를 한다면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100kg짜리 역기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와 똑같은 동작과 속도로 합니다. 그러면 몸에서 땀이 뻘뻘 나고, 100kg 역기를 드는 힘이 들어가게 돼죠.”

추석장사대회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었다. “단오대회 일주일 전에 2차 항암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계속 몸에 약물을 집어넣으니까 2차 항암을 한 뒤에는 구역질이 너무 심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상상 체력훈련도 할 수 없었죠. 한 달 반 공백을 거치고 복귀한 지 2주째입니다. 하나하나씩 한계를 맛보면서 하고 있죠.”

처음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저는 스스로 굉장히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암’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졌어요.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여태껏 쌓아왔던 게 무너지는 건 아닌가, 난 아직 젊고 자녀가 3명이나 있는데…. 이런 걱정이 교차하면서 다시 운동을 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이겨냈을까. “제가 나가는 교회에 ‘갑상샘암과 운동선수의 연관관계’라는 책을 쓰신 체육대학 교수님이 계세요. 그분이 ‘갑상샘암 별거 아니에요. 죽으면 죽으리라 생각하고 다시 하세요’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여기까지 온 게 내 능력은 아니잖아’ 생각하니 더 강한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항암치료가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묻자 그는 “수술 들어가기 전에 생각으로 암을 다 죽였어요. 인터넷에서 갑상샘 암세포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전이되는지 사진을 다 봤죠. 수술 날짜 잡은 뒤에는 내 암세포들이 어떻게 도려내져서 죽는지를 생생하게 그렸어요. 수술 후 어떤 증상이 나오고 어떤 통증이 있는지 등도 자세한 설명과 제 구체적인 상상을 통해 이미 다 겪어버린 거죠. 처음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두 번째 겪는 거랑은 전혀 다르잖아요”라고 설명했다.

이주용 선수는 “제가 상상한 것과 실제가 완벽하게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물론 상상과 실제상 통증의 강도 차이는 조금 있지만 이 또한 겪어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죠”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루틴

루틴

이주용 선수는 경기대를 졸업하고 실업팀에 간 첫해 3개 대회 결승에 올랐다. 이길 수 있다고 믿은 상대에게 다 졌고, 세 번째는 팔 경련이 와서 경기를 포기하다시피 했다.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그는 ‘점 그래프’라는 자신만의 멘털 기법을 만들어낸다. 1년 12개월, 4주, 7일, 하루 24시간, 1시간, 1분…. 이런 식으로 고무줄 늘리듯 시간을 늘려나가면 지금 겪는 시간은 인생에서 보일락말락한 점에 불과하다. 점도 안 되는 이 시간을 힘들다고 버티지 못하면 평생 후회를 남기게 된다. 이게 ‘점 그래프’ 멘털이다.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 그가 또 개발한 게 ‘신체와의 대화’다. 힘든 산악훈련을 앞두고는 무릎을 붙잡고 “무릎아, 이번 훈련 좀 힘들 거야. 그래도 조금만 버티자. 끝나고 마사지해 줄게. 잘할 수 있지?”라고 말하고는 “응, 잘할 수 있어”라고 자답하는 거다. 살짝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신체 각 부위에 대해 앞으로 닥칠 상황을 미리 알려주고, ‘당근’도 제시하는 기법이다. 산악 달리기 훈련 도중 깔딱고개를 만났다 치자. 잠이나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억지로 끌려나온 종아리와, 이것만 넘으면 기분 좋은 마사지가 기다리고 있다고 기대하는 종아리 중 어느 쪽이 더 가볍게 산을 타고 덜 다칠까.

남매가 의지하며 죽음의 유혹 뿌리쳐

감각일기를 쓰는 것도 이 선수만의 독특한 습관이다. 그는 “어떤 씨름 기술을 ‘이건 내 거다. 이걸로 밥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기술이 내게서 빠져나가버리는 경험을 참 많이 했어요. 그걸 막기 위해서 높아진 자아를 꺾는 훈련과 함께 나만이 아는 언어로 그 기술이 들어가는 순간의 느낌, 감각, 동작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주용 선수는 어떻게 이런 기발한 멘털 훈련법을 개발했을까. 그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답했다. 그 경험은 처절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이주용은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 수원으로 올라왔다. 술을 자주 마셨고 어머니에게 강압적이었던 아버지는 끝내 이혼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가 운영하던 지하 술집에 주용이 남매를 데려왔다. 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방에 아이 둘은 초저녁부터 술집이 문을 닫는 새벽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극심한 소음과 악취 속에 둘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누나는 교회를 찾았고, 주용은 빵과 우유, 수요일 고기 회식이 있는 씨름부를 찾았다. 주용은 체격이 왜소했지만 끝없는 노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고교 시절 당시 관행이었던 구타와 폭력, 마음 붙일 곳 없는 가정에 절망한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자 “널 위해 기도하고 있었어. 절대 이상한 마음 품지 마”라고 울며 매달렸다.

고2 때 훌쩍 커진 이주용은 대학-실업을 거치며 승승장구한다. 신앙을 갖게 됐고,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그는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자신만의 생활 루틴을 지킨다. 대회 때 루틴은 더 특별하고 철저하다. 고형근 수원시청 감독은 “주용이처럼 자기관리가 철저한 선수는 본 적이 없다. 마흔 넘어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암을 메다꽂은 멘털지존 이주용. 몸보다 마음이 더 강한 그가 2019 추석장사 꽃가마를 탈 수 있을까.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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