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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만들기] 20. 청계고가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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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청계천이 복개되자 도로의 너비가 50m로 넓어졌다. 196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였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부임 이듬해인 67년 봄 문득 "미아리고개~청계천~신촌.홍제를 잇는 유료 고가도로를 건설하면 서울시내 차량 소통이 훨씬 원활해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金시장은 건축가 김수근씨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설계 스케치를 부탁했다. 때마침 일본 도쿄(東京)에 64년 올림픽을 대비한 고가도로가 건설돼 편리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한 김씨는 도쿄 고가도로 설계 등을 참고해 만든 고가도로 조감도를 金시장에게 보였다. 金시장은 67년 8월 8일 '유료 고가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청계천을 거쳐 동북쪽으로는 미아리, 서쪽으로는 서대문~홍제동, 서대문~신촌, 서대문~의주로~삼각지를 연결하는 유료 고가도로를 69년까지 완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계획을 보고 '엉뚱하지만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67년 말 현재 서울시에 등록된 차량은 2만5천6백80대였으며, 이 중 자가용은 4천75대에 그쳐 굳이 고가도로를 건설하지 않아도 차량 소통에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이 발표되자 전문가들과 언론이 반대하고 나섰다. 주로 외곽지역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드는 고가도로를 도심에 건설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지하철 건설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유료 고가도로 건설 계획은 크게 후퇴했다. 무교동~신문로~서대문로터리를 거쳐 신촌과 홍제동에 이르는 당초 계획과 달리 신촌은 커녕 서대문로터리까지도 못 가고 광교에서 공사가 끝났다.

이같이 계획이 크게 축소됐지만 金시장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광교에서 청계천을 거쳐 용두동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로 청계고가도로를 이용해 워커힐을 뻔질나게 찾았다.

청계고가도로 건설공사는 70년 양택식 시장이 부임 후에도 계속됐다. 1호터널이 뚫린 남산과 연결되고, 청계천 7가에서 마장교까지 연장됐다. 朴대통령의 워커힐 나들이가 훨씬 편리해졌다.

청계고가도로가 지난 7월 철거 직전의 모습을 갖춘 때는 71년 8월 15일이었다. 본선 길이 5.86km에 25개 램프의 길이가 2.58km에 달했다. 청계고가도로는 교각이 세워질 때부터 투박한 인상을 줬다. 이는 '적은 비용으로 많은 양을 짓는다'는 金시장의 건설철학에 따라 비싼 수입 철근.철판은 적게 쓰는 대신 값싼 시멘트를 많이 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개통 후 이용 차량의 급증으로 뻔질나게 벌어진 '땜질식 보수'도 한몫했다.

복개도로를 들어내고 복원한 인공 청계천에 잠자리나 개똥벌레가 찾아올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청계천의 너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쪽 10m씩 도로를 내고 나면 청계천의 너비는 30m를 못 넘는다. 청계천 양쪽으로 재개발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탁 틔인 시원한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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