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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러 과학자 5명 숨진 의문의 폭발…동북아 흔들 신 핵무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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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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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러시아 북부 아르한겔스크주 세베로드빈스크 인근의 뇨녹사 군 훈련장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발사고가 미국과 러시아가 물밑에서 벌여온 새 핵무기 개발 경쟁을 전 세계에 노출했다. 러시아의 대응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알렉세이 리카체예프 로사톰(러시아 원자력 공사) 대표는 12일 “이번 사고로 본사 과학자 5명이 사망했으며 이들은 핵 분야를 이끌던 진짜 영웅들이었다”라고 말했다고 러시아 관영 매체인 스푸트니크 뉴스 영어판이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이 “국가적으로 주요한 신무기 개발 임무를 수행하다 숨졌다”며 이틀의 애도 기간 선포도 모자라 12일 ‘국가 영웅’ 칭호까지 수여했다.

냉전종식 상징 INF 폐기 후폭풍 #고삐 풀린 미·러, 핵확장 신냉전 #러 미사일 개발 폭발로 드러나 #미·중·러 핵협상땐 동북아 요동

푸틴 “전 지구 사정권 최신 핵무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서 전시한 OTR-21 토치카 단거리 미사일, BM-21 그라드 다연장로켓포, 9M720 이스칸데르-M 중거리 미사일, BM-30 스메르치 다연장로켓포.(왼쪽부터) 토치카와 이스칸데르-M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북한이 지난달부터 쏘아온 발사체는 이스칸데르-M과 스메르치의 사거리를 늘린 개량형으로 보인다. [EPA=연합뉴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서 전시한 OTR-21 토치카 단거리 미사일, BM-21 그라드 다연장로켓포, 9M720 이스칸데르-M 중거리 미사일, BM-30 스메르치 다연장로켓포.(왼쪽부터) 토치카와 이스칸데르-M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북한이 지난달부터 쏘아온 발사체는 이스칸데르-M과 스메르치의 사거리를 늘린 개량형으로 보인다. [EPA=연합뉴스]

러시아 국방부는 “액체 추진 로켓을 시험하던 중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지만, 뉴욕타임스(NYT)는 미 정보당국을 인용해 “신형 핵 추진 순항미사일인 SSC-X-9 스카이폴(나토명) 시험 도중 사고가 났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러시아에선 9M730 부레베스트니크(슴새)로 부르는 이 미사일은 지난해 3월 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정 연설에서 ‘지구 어디든지 도달할 수 있다’며 소개한 최신 핵무기”라고 전했다.

당시 푸틴은 2시간의 연설 중 45분을 신무기 소개에 할애하면서 이 미사일을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를 뚫는 대륙간 원자력 추진 순항미사일로 내부에 소형 원자로를 장착해 사거리를 기존의 수십 배, 실질적으로는 무한대로 늘릴 것”이라고 자랑했다. 지난 8일 시험 도중 폭발한 미사일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푸틴은 “다른 나라가 현재 개발 중인 마하 5 이상의 극초음속 미사일을 러시아는 이미 2017년 12월 남부 군관구에 실전 배치했다”며 “신무기 개발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MD는 무용지물이 됐다”고 말했다. 그가 소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RS-26 아방가르드는 사거리 5800㎞에 최대 속도가 마하 20의 극초음속(HGV)이라 중간에 요격할 방법이 현재 기술로는 없다. Kh-47M2 킨잘(단검) 공대지 순항미사일은 사거리 3218㎞의 중거리 미사일로 마하 10 이상의 극초음속으로 비행한다.

특히 차세대 ICBM RS-28 사르마트는 10~24개의 핵탄두를 싣고 최대 1만8000㎞의 거리를 최고 마하 20.7의 극초음속으로 비행하는 가공할 전략무기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를 포함한 현존하는 모든 미사일 방어(MD) 체계를 뚫을 수 있다고 외교전문지 디플로매트는 설명했다. 푸틴은 미사일에서 분리된 다음에도 자체 비행하는 신형 극초음속 탄두인 오브젝트 4202를 사르마트에 장착하면 지구 상 어디도 1시간 안에 타격할 수 있다며 한 방으로 프랑스나 텍사스 주 면적을 초토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뉴욕·샌프란시스코 같은 미국 대도시와 해군 기지를 타격할 핵 추진 대륙간 수중 드론인 포세이돈도 소개했다.

러시아의 모스키토 대함 미사일. [타스=연합뉴스]

러시아의 모스키토 대함 미사일. [타스=연합뉴스]

당시 서방은 푸틴의 신무기 소개를 국내 정치용 홍보전의 일부로 여겼지만, 지난 8월 2일 미국과 러시아 간 중거리핵전력(INF) 폐기조약이 사라지면서 새삼 주목 받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새로운 핵무기 군비 경쟁을 준비해왔다는 이야기다. 이는 미국과 러시아가 오랫동안 노력해온 핵무기 군비통제 시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군비경쟁 시대를 개막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그동안 미국과 소련, 미국과 러시아는 핵 군비통제를 위해 1972~2002년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 1987~2019년 INF 폐기조약, 1991~2009년 제1차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Ⅰ), 1993년 의회 비준을 받지 못해 폐기된 제2차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Ⅱ), 2003~2011년 전략공격무기제한조약(모스크바 조약) 등을 맺어왔다. 그럼에도 현재 유효한 조약은 2010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서명한 신전략무기감축조약(뉴START)뿐이다. 2011년 발효돼 2021년 2월 5일까지 유효하며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축적한 핵·미사일 기술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이를 유지할지 의문이다.

ICBM보다 중거리 핵미사일 더 문제

RS-24 야르스 대륙간탄도미사일. [타스=연합뉴스]

RS-24 야르스 대륙간탄도미사일. [타스=연합뉴스]

게다가 미국은 중국이 참여하는 미·러·중 삼각 핵군축을 원하지만,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합의해서 가져오면 검토하겠다며 이를 거부하고 있다. 냉전 기간에 국력이 밀렸던 중국은 INF를 포함한 핵 군축에 참가하지 않아 그동안 중거리 핵미사일을 포함한 핵무기를 마음 놓고 증강할 수 있었다. 사실 핵 군비통제에서 ICBM보다 더 큰 문제는 사거리 500~5500㎞의 중거리 핵미사일이다. 즉시 발사할 수 있고, 고속 비행하며, 사거리가 짧아 목표물까지 닿는 시간이 몇십 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협상·대화는 물론 조기경보 시간마저 없이 인류가 순식간에 핵 전쟁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조인돼 그동안 냉전과 핵전쟁 위기 종식의 상징이었던 중거리핵전력(INF) 폐기조약이 2일 사라지면서 동북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가 냉전과 핵 위기의 시대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일 수밖에 없다.

미국과 러시아는 중거리 미사일을 시작으로 핵무기의 개발·생산·배치 경쟁에 박차를 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들은 특히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최전선 삼아 핵 군비경쟁을 가속하면서 핵 확장 시대로 회귀할 것으로 우려된다. 중거리 미사일은 사거리 특성 상 러시아는 유럽·극동에, 미국은 괌·한국·일본 등 아시아 지역과 유럽의 나토 회원국에 배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중거리 미사일을 놓고 한바탕 홍역을 치를 가능성이 큰 가운데 한국은 핵무기 재배치와 동아시아의 군사 균형 변화라는 안팎의 문제를 동시에 안게 될 전망이다.

중국은 이에 반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에서 베이징은 952㎞, 평택 미군기지에서 베이징까지는 986㎞, 도쿄에서 베이징은 2098㎞로 모두 사거리 500~5500㎞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권 안이다. 평양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이 7월부터 쏘아온 발사체에는 사거리 200㎞ 전후의 대형조종방사포와 함께 550㎞가 넘는 중형 미사일도 포함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기를 잘 활용하면 동북아는 물론 전 세계에 새로운 핵 질서를 세우는 핵 다자외교의 시발점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한국의 생존을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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