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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여권은 대통령의 “감정 대응 자제” 주문 안 들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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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재인 대통령이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대일(對日) 문제의 감정적 대응 자제를 주문했다. ‘결기를 가지되, 냉정하면서도 근본적인 대책까지 생각하는 긴 호흡’을 강조했다. 한·일 갈등이 경제·외교·안보 등 전(全)방위로 확산하는 사태를 막겠다는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의지를 비쳤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일부 당·정·청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뜻을 여전히 거스른 채 무책임·무분별한 발언을 쏟아 내고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연금 ‘전범 기업’ 투자 배제 등 #현장서 당·정·청 자극적 발언 계속 #지금은 냉철한 상황 관리 나설 때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전범 기업을 투자 목록에서 배제할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책임 투자’ 차원에서라도 과거 우리 국민에게 고통을 안긴 일본 전범 기업에 투자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동안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제기돼 왔다. 그러나 한·일 갈등 국면에서 국민연금공단 최고 책임자가 직접 이 문제를 꺼낸 것은 적절치 않다. 무엇보다 수익률과 안정성을 기준으로 운용돼야 할 국민연금이 중립성을 잃고 정치 논리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가뜩이나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 등과 관련해 ‘연금 사회주의’ 등의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전범 기업 투자 배제’는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에까지 정부 입김을 미치려 한다는 비판을 부를 수 있다. 투자 배제가 현실화할 경우 “왜 내 노후 보장 수단이 외교 갈등에 이용돼야 하느냐”는 반발을 피할 수 없다.

나아가 이 문제는 지금의 한·일 경제 갈등에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다. 2014년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지원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한국인을 강제동원한 전력이 있는 일본 기업은 총 299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이 중 75개 기업에 1조2300억원가량을 투자하고 있다. 여기엔 미쓰비시·도요타·스미토모·히타치·도시바 등 일본 유수의 기업이 포함돼 있다. 이들에 대한 투자를 철회 혹은 중단할 경우 일부 상품 규제에 머무르던 갈등이 금융·투자 영역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일본의 공적연금(GPIF)은 한국 증시에 약 7조원을 투자하고 있다. 이들 자금이 빠질 경우, 다른 외국계 자금이나 증시 외 자금의 움직임마저 자극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경제에 또 하나의 불확실성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다.

대통령의 자제 촉구와 어긋나는 무분별하고 감정적 언행은 이뿐이 아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한테 영향을 미치는 일본 전략물자는 ‘손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지 않았다. ‘글로벌 호구’ 될 일 있나” 등의 거친 표현을 쏟아냈다. 문제를 풀어야 할 통상외교 책임자가 상대국이나 우호국을 자극해 뭘 얻자는 건지 의아할 뿐이다. 여당의 ‘일본 경제침략 대책 특위’라는 데서는 일본 기자들을 불러 ‘네살짜리 어린애짓’ ‘가소로운 일’이라는 말을 써가며 분풀이 신경전을 벌였다. 우리 입장을 일본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게 해야 할 일본 언론을 상대로 싸워 뭘 어쩌자는 건가.

책임 있는 집권 세력이라면 무엇보다 우리 국민과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신경 써야 한다. 효과도 없는 불필요한 감정싸움을 자제하고, 확전보다는 상황 관리에 힘을 쏟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