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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이민화를 떠나 보내기 힘든 벤처 기업인들

중앙일보

입력

지난 5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이민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케이스쿨(K-School) 겸임교수 추도식. [사진 벤처기업협회]

지난 5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이민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케이스쿨(K-School) 겸임교수 추도식. [사진 벤처기업협회]

“그는 기업가 정신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에게 영감을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창업에 나섰습니다. 그 청년들이 실패해도 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평생을 매진했습니다.”

 지난 5일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에서 열린 고 이민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케이스쿨(K-School) 겸임교수의 추도식장. 한정화 한양대 교수가 추도사를 낮은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자 장내 곳곳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2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준비한 의자가 부족해 추가로 의자를 가져왔지만, 그조차 모자라 많은 사람이 뒤편에 서서 고인을 애도했다. 추도객이 너무 많아 장례위원회에서 가족과 친지, 장례위원들만 추도식에서 헌화하도록 제한하기도 했다.

 향년 66세로 지난 3일 영면에 든 이 교수는 ‘한국 벤처의 대부’로 불렸다. 1985년 초음파 진단기기 전문기업인 메디슨(현 삼성메디슨)을 창업한 후 1995년 벤처기업협회를 만들었다. 국내에서 벤처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때다. 이듬해엔 벤처기업 자금 조달을 위한 코스닥 설립을 주도했다. 1997년에는 창업 촉진을 위한 벤처기업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다. 메디슨 경영에서 물러난 뒤에도 후학을 가르치며 창조경제연구회(KCERN)를 만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창업가들을 지원했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장은 추도사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전화 주셔서, '안 회장. 이건 벤처협회가 적극적으로 나셔야하지 않겠나?' 하시며, 혜안을 주시고 격려해 주실 것만 같습니다"라고 했다.

 지난 5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이민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케이스쿨(K-School) 겸임교수 추도식. [사진 벤처기업협회]

지난 5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이민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케이스쿨(K-School) 겸임교수 추도식. [사진 벤처기업협회]

 이 교수는 젊은 스타트업 창업가들에게도 든든한 ‘큰형님’이었다. 2017년 ‘이민화 의료창업상’을 수상한 강성지 웰트 대표는 6일 발인식에서 운구를 맡았다. 그는 “분기에 한 번은 꼭 점심을 사주면서 요즘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에 관해 묻고 조언을 해주셨다”며 “사회에 공헌하는 법, 후배들에게 베푸는 법에 대해 항상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일면식이 없어도 젊은 창업자들 소식을 들으면 먼저 연락처를 파악해 전화해서 ‘당신이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니 열심히 하라’고 조언해 줬다"며 "이 교수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는 청년 창업가들이 많다”고 전했다.

 고 이 교수를 추모하는 열기가 뜨거운 것은 아직 벤처 환경이 열악한데 큰일을 할 선배를 먼저 보냈다는 아쉬움의 방증이기도 하다. 벤처인들은 ‘기업가 정신 확산’과 ‘규제 혁파’로 대변되는 ‘이민화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는 “1990년대 척박한 벤처 생태계를 이만큼 키워낸 뜻을 이어받아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고 창업가들이 사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더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게임사 웹젠의 창업자인 김병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벤처 붐 시절과 비교해보면 요즘은 청년들의 창업 의지와 열기가 떨어진 측면이 있는데 이를 되살려야 한다”며 “창업가의 의지를 꺾는 여러 규제를 혁파하는 데 보다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225조원. 벤처기업 정밀실태조사 보고서(2017년 12월 말 기준)에 나오는 국내 벤처기업의 연 매출 규모다. 고 이 교수가 벤처기업협회를 만들었던 1995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다. 종사자 수만 76만명에 이르는 등 벤처기업은 한국의 미래를 먹여 살릴 성장 엔진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눈부신 외관 성장과는 별개로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많은 스타트업들이 혁신적 서비스로 도전장을 내고 있지만, 공유경제 등 4차산업 혁명 분야 스타트업들은 규제의 벽에 부딪혀 제대로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혁신의 원천은 있으나 규제로 가로막혀 있다”는 이 교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교수에 대한 추모 열기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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